여성학자이자 작가 정희진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이렇게 해석했다. 여태껏 본 적 없는 분석이었다.
이 표현은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에 나온 것이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내용에 집중했다. 어쩌면 한 가지로 귀결될지도 모르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피해자의 오만'이란 대체 무엇일까.
영화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신애'라는 인물은 유괴범에게 아이를 잃었다. 그녀는 전적으로 피해자다. 정희진도 언급했듯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고통이 있다고 한다. 아이 잃은 엄마의 고통과 그 외의 것. 이 말이 암시하듯 신애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신앙의 힘으로) 그녀는 가해자를 용서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해자에게 알려주고자, 자신이 용서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신의 사랑을 그에게도 전해주고자 감옥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피해자의 용서 따윈 필요 없는, 이미 구원을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은 가해자를 발견한다. 그녀의 얕은 안녕은 무너진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구원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해석한다. 하지만 정희진은 '고통의 체험'에 주목한다. 정희진이 보기에 득도한 것 같은 가해자의 모습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가해자에게는 고통의 체험이 없다.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적이 없다.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가해자는 그러므로 쉽게 자신을 용서하고 구원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는 그럴 수 없다. 그들은 피해의 경험이 있기에, 몸에 박힌 고통이 존재하기에 구원과 평안을 받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정희진이 보기에 고통이나 피해의 경험은 용서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 삶의 '사고'일뿐이다.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아 나의 언어로 표기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당위와 논리를 찾아선 안 된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살인마 안톤시거는 피해자의 생사여부를 동전 던지기로 결정한다. 사고란 이처럼 무작위적이다. 신도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이란 대개 이런 종류이다.
그러나 이 사고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피해자는, 혹은 피해자에게 구원과 용서를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창이자 방패다.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발생하는 구원의 역설 속에서, 피해자가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도덕적 우월감'이다. 이 우월감은 마치 피해자가 신과 같은 자리에서 가해자를 용서하고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 여기게 만든다. 이것은 피해자의 '오만'이고, 바로 여기에서 <밀양>의 비극이 발생한다.
두 번째, 또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고통의 체험'이다. 고통의 체험자는 고통의 관찰자와 다르다.
출처 : 딴지방송국 (철학자가 보는 윤석열의 자유-박구용 교수)
몇 년 전, 집중호우로 일가족 세 명이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서 사망했다. 그것을 누군가는 '관찰'했다. 그는 철저히 고통의 관찰자로 존재했다. 고통을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나도 누군가의 고통을 구경하는 관찰자로 있지는 않았나. 그러므로 나 역시 고통의 가해자는 아니었을까반성해본다.
올해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읽은 책 중 두 권의 책이 떠오른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눈먼 자들의 국가>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다.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는 수전 손택의 글을 인용한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에서 고통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배웠다.
<싯다르타>에서는 진리를 고민하며 두 갈래 인생으로 나뉜 싯다르타와 고빈다가 나온다. 세속의 모든 영욕에서 물러나 고행의 삶을 산 고빈다는 세상 속에서 모든 고통을 체험한 싯다르타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모든 사람의 얼굴이 담긴 것을 본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경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고통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 책을 읽는 것들은 간접적으로나마 그런 고통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우리는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고통을 체험해야 한다. 관찰자가 아닌 체험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이 또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적어도 그 고통에 참여하는 자에 가까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고통을 공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