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희진 Mar 05. 2020

근로자가 아닌 방송작가.

잦은 밤샘과 휴일도 없이 일하는 나에게 항상 묻는 말들. "야근 수당 많이 받겠네", "휴가는 언제가?", "주말 출근하면 휴일 수당 받겠네", "프리랜서라면서 언제 쉬어?" 등등. 일반 직장인이라면 당연하게 있는 것들이 방송작가에게는 없다. 다들 내 대답을 들으면 왜?라는 질문과 어리둥절해 하지만 난 그것에 대해 '관행이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방송계의 오랜 치부이자 변화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렇게 참고 지내야만 했던 날들이었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라고 하지만 프리랜서가 아니다. 이전 글에도 있지만 방송작가는 방송사나 외주 제작사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정식 근로자로 인정받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받는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도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1. 4대 보험 대상자가 아니다.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방송작가들은 계약직도 아닌, 근로자도 아닌 프리랜서다. 따라서 페이를 받을 때도 원천징수 세금 3.3%를 떼고 받게 된다. 보통 직장인들이 연말 정산을 12월에 할 때 방송작가들은 5월 달에 세무신고를 한다. 4대 보험 대상자가 아니다 보니 일하다가 다쳐서 받는 산재 같은 것들은 해당 사항이 아니다. 아프고 다치면 오롯이 본인 책임이고 해결해줘야 할 의무가 사측에는 없다. 


2. 프리랜서라고 하지만 출근은 매일 한다.

말이 프리랜서지, 작가들은 보통 외주제작사로, 방송국으로, 특정 사무실 공간으로 출근을 한다. 다른 직장인들처럼 9 to 6처럼 정해져 있는 시간도 없다. 프로그램마다 다르지만 보통 할 일을 할 시간에 출근을 해서 일이 끝날 때 퇴근을 한다. 일이 끝나지 않으면 퇴근은 없다. 야근, 밤샘, 또는 다음날까지 계속 일한다. 프리랜서니 재택근무를 하겠다고 말하면 대놓고 싫어하는 제작사 대표들도 있다. 대표의 눈치가 그렇다 보니 메인작가와 제작팀장도 눈치를 주니 프리랜서지만 매일 출근을 하는 경우가 많다. 


3. 주말출근, 야근을 하지만 따로 수당이 없다. 

그러면 평일만 출근을 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일이 계속 진행되면 주말 출근도 하고 공휴일 출근도 한다. 남들 다 쉬는 설날, 추석, 법정 공휴일도 의미 없어진 지 오래다. 오히려 설날, 추석 특집에 안 걸리면 다행이지. 1월 1일 새해도 일하면서 맞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렇게 일하면 일반 직장인들은 휴일수당, 야근수당이 나오겠지만 방송작가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택시비도 안 주는 걸. 오래간만에 쉰다 싶은 주말에도 무슨 일이 터지면 바로 출근하거나 어디서든 컴퓨터로 업무를 봐야 한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컴퓨터의 역할을 대신 못해줄 때는 피씨방을 찾아다닌 적도 상당히 많다. 


4. 월차, 연차, 휴가의 개념이 없다. 

위와 같은 개념으로 월차, 연차, 휴가도 없다. 프로그램에 따라서 쉬는 스케줄들이 생기긴 하는데 그걸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요청할 수 있는 휴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남들 다 가는 여름휴가, 겨울 휴가는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또는 내 텀의 방송이 끝났을 때 갈 수 있다. 물론 일신상의 이유로 출근을 못하게 되는 날들이 있지만 그걸 월차, 연차, 휴가의 개념으로는 쓰지 않는다. 


이 모든 내용에 '대체 왜 그래?'라고 물으면 방송작가들은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방송작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표준 근로계약서라는 걸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써봤다는 선배들도 보지 못했고 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보지 못했다. 방송작가들의 취업은 대부분 이력서와 면접을 통해 채용된다. 그 과정에서 근로 조건에 대해 따지는 건 스케줄과 페이 정도. 서류로 된 계약서를 쓰지 않기 때문에 꽤 많은 리스크들을 감당하며 일을 한다. 


다행히 최근에는 방송작가들도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자는 움직임이 있어 작성하는 곳도 있지만 아주 일부다. 지금부터 쓰자고 아무리 말해봐도 이 관행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막내작가들 월급도 60만 원, 80만 원이었던 시절이 꽤 길었고 만약에 최저임금이 오르지 않았다면 2020년인 지금도 저 금액을 받았겠지. 방송계의 환경을 바꾸는 것,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나아질 기미가 보일까 말까이다. 이런 막막함에도, 이런 부당함 속에서도 왜 계속 이 일을 하냐고 물으면 배운 게 이거라서, 잘할 수 있는 게 이 일이라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 때문에. 이런 부담함보다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이 아직은 조금 더 커서. 


근로자이지만 근로자로 인정받지 않는 방송작가들. 이건 내 방송작가 인생 중에 꽤 큰 사건 하나를 남겼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나중에. 그러나 반드시 하고 싶은 이야기. 















이전 16화 방송국으로 출근 안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