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세 명의 외삼촌이 있다 (2)
작은외삼촌과는 자연스레 연락이 멀어졌다.
항상 막내외삼촌으로부터 소식을 주고받다 보니, 따로 연락이 뜸한지도 몰랐던 즈음이었다.
어느 날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앞뒤가 거의 똑같은 번호 배열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저장이 안 되어 있어도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웬일인가 싶으며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용건은 이랬다.
고향 광주에 계신 외할머니가 다리 수술을 앞두고 계시고, 한동안 병원 치료와 통원을 해야 하는데 연로하시기도 하고..
이래저래 서울로 모시려고 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당신 집은 사정이 이래서 안 되고, 막내 집은 저래서 안 되고, 그래서 원룸을 하나 구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내 엉뚱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랑 얘기하다가, 이래저래 너네 밥도 해주고 하며 같이 살면 어떻겠냐 하니 너무 좋아하시더라."
마치 좋은 아이디어라도 내놓은 듯한 어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환멸'이라는 감정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전화번호가 저장조차 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아무 연락 없던 삼촌이,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 하는 첫마디가
"우리 어머니를 손주인 너희가 모셔라"라니.
걱정과 배려의 말투로 포장되어 있었고, 마치 상부상조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안타깝게도 속아줄 만큼 어리석지 못했다.
나는 그저 "다시 연락드리겠다"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이미 나보다 먼저 통화를 마친 상태였다.
심지어 아빠에겐 방값을 보태자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아빤 그저 한숨 쉬며 듣고 계셨고, 나는 욕만 없는 심한 말을 퍼부었다.
"아빠, 엄마 돌아가신 지가 8년이야. 내가 지금 이미 성인이고.
밥 못 해 먹을까 봐 걱정돼서 밥을 해주면서 살아? 그게 걱정이었으면 초등학생일 때 좀 들여다보지 왜.
나 삼촌 번호도 없었어. 그 정도로 연락 끊고 살더니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자기 어머니를 모셔?
왜, 자기도 모시기 싫은 거 우리한테 떠넘기냐고.
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자식들 두고 원룸에서 손주들이 늙은 할머니 병수발하면서 살아야 되냐고,
아니면 사별한 사위가 아내도 없이 장모를 모시고 살아야 되냐고.
본인은 아내도 자식도 끼고 살면서, 아빠는 아내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살라는 거야 뭐야.
사별도 이혼이랑 똑같아.
사회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아빤 그 집 사위 아니고 남이니까, 앞으로 그 집안일 신경도 쓰지 마."
아빠는 나처럼 화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오래 묵은 서러움이 배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외할머니한테 죄책감을 갖고 있던 그는, 그저 그런 제안이 슬펐다.
"아내가 있었더라면 당연히 모셨을 텐데"라는 생각이 그의 상실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만 같았다.
그 뒤로 더 연락을 주고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너무 화를 내서, 아빤 더 이상 그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결국 외할머니는 작은 원룸에서 몇 년을 혼자 지내셨다.
대학가의 2층집 빌라였는데,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만 있는 집이었다.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한 손으로 계단을 짚으며 오르시는 할머니를 보며, 그들의 배려의 수준을 보았다.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이따금 냉장고를 채워가며 들렀고, 췌장암에 걸리신 뒤로는 막내아들 집에서 여생을 마치셨다.
모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를 의심하진 않는다.
대치동 학부모 뺨치게 학력에 목숨 거는 작은외숙모가 곧 고3인 사촌동생과 시어머니를 함께 두려고 하지 않았을 테고,
막내외삼촌은 당시 사업이 안 좋아져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세 살짜리 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아갔을 때이니까.
책임질 자식이 생긴 부모 입장에서, 부모 노릇과 자식 노릇 둘 다 챙기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직접 모시지 않는 것에 대한 이견은 없다.
누구도 악의로 그런 결정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을 문제 삼고 싶진 않다.
그러나, 그 말은, 그 전화 한 통은 내 귀에 닿아서는 안 됐다.
그건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관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말이었다.
그 한 마디로 나는 있지도 않았던 가족을 또 한 번 잃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진심을 묻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믿었는지, 아니면 잠깐의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전화는 내게 분명한 신호였다.
누군가는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신호,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다시 마음을 줄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선을 넘는 말에 민감해졌다.
관계의 무게를 말 한 줄로 던지는 사람들을 조심하게 됐다.
그때 느꼈던 환멸은 단지 삼촌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무책임한 어른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사람이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의 방향을 아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책임을 나눌 수는 있지만, 떠넘길 수는 없다.
그 둘의 차이를 모르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너무 어릴 때 알아버렸다.
그 후로 나는 관계를 맺을 때, 사람의 말보다 태도를 먼저 본다.
'도움을 청하는 말'과 '짐을 지우는 말'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구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부담이 아닌 위로가 되려면, 그 말이 건너가는 거리와 무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나는 그걸 가족에게 배웠다.
때론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장 쉽게 사람을 다치게 하기도 한다.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자주 되뇐다.
사랑을 주되, 그 사랑의 무게를 떠넘기지 않는 어른.
그게 내가 어른들에게서 배운, 역설적인 교훈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멈춘다.
누군가에게 닫힌 마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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