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두 번째 부모가 있다면

내게는 세 명의 외삼촌이 있다 (1)

by Dear Mi

당시 기준으로 장가를 늦게 가셨던 막내외삼촌은 조카들을 끔찍이도 아껴하셨다.

어릴 적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인형의 집 세트나 레고 시리즈는 항상 막내외삼촌의 지갑에서 나왔다.

색종이를 펼쳐놓은 듯한 믿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나 벽돌 같은 수학의 정석 시리즈도 삼촌의 손에 들려왔다.


막내외삼촌과는 추억도 감사함도 많다.

초등학생 때 삼촌한테 스시 먹는 법을 배웠다. 생선이 옆으로 오게끔 돌려 잡고, 밥알에 닿지 않게 생선살에만 간장을 살짝 찍어 한입에 먹기.

그날 배가 너무 부르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편안한 식사를 배웠다.

절제와 만족을 조율할 줄 아는 사람, 그게 삼촌이었다.


서울대 전액 장학금에 빛나는 과외 경력으로, 나와 오빠가 손에서 공부를 놓기 전까지 우린 사실상 고급 과외를 무료로 받았다.

18살 차이 나는 사촌동생이 생기기 전까지는, 매주 삼촌댁에서 주말을 보내기도 했다.

직장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주말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안다. 다 큰 조카 둘을 위해 주말을 내어주는 일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을지, 이제야 알겠다. 감사함보단 미안함이 먼저 몰려왔다.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이 함께한다고 했던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조카들을 위해 몇 시간씩 요리를 해주시던 막내외숙모는 우리 엄마랑 많이 닮았다.

표고버섯에 예쁘게 모양을 내서 만든 스끼야키를 먹는 법을 알려주시고, 여자 아이라고 매번 욕조에 배스솔트를 풀어 목욕을 시켜주셨다.

힘들어도 항상 유머로 승화시키는 두 분 덕분에, 여전히 세상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런 숙모가 <생로병사의 비밀>에 출연하신 적이 있다. 뇌출혈로.

한 군데만 터져도 위급한데, 열 군데가 동시에 터졌지만 급소를 피했다고 한다.

보통 진료를 가면 의사가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고 저렇다 설명해 주는데,

담당의가 "이건 설명이 안 돼요. 그냥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사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기적처럼 살아나셨고, 한동안 후유증에 고생하셨지만 지금은 꽤나 건강히 지내고 계신다.


다른 가족들에 비해 그 소식을 조금 늦게 접했다.

당시 12년이나 지난 무렵이었지만, 우리에게 트라우마가 될까 봐 차마 못 전하셨다고 했다.

어른들의 걱정에 비해 우린 너무 덤덤했지만,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했다.

이게 이렇게 또 마주할 일인가 싶어서.

몇 번의 수술이 지나 일반 병동에 계실 때 비로소 병문안을 갈 수 있었다.

오빠와 나란히 앉아 어린 동생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날 나는 그 '기적'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엄마도 저렇게 잘 넘기셨으면 좋았을 텐데"

반면 오빠는 "저 어린 동생을 나중엔 내가 책임져야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게 본성이라는 건가. 같은 상황에서 우린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과거를 먼저 떠올렸고, 오빠는 미래를 생각했다.

내게 숙모의 '살아있음'음 먼저 잃어버린 것을 떠올리게 하는 거울이었고,

오빠는 그 상황에서 남은 사람을 어떻게 지켜낼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먼저 떠올렸다.


나는 여전히 과거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과거를 정면으로 두고 조금씩 뒤로 길을 붙여가는 사람과, 그 자리에서 뒤돌아 새로운 앞을 만들어가는 사람.

나의 불안감과 외로움은 그 차이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누군가의 부재가 나의 정체를 흔들면, 나는 먼저 과거를 붙잡아 스스로의 기억을 확인하려 한다.

그래서 사람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관계에서 끊임없이 확인을 요구한다.

반면 오빠는 남은 것들의 목록을 세는 사람이었다.

상실을 상수로 인정하고, 그 상수 앞에서 행동 가능한 목록을 만드는 방식으로 불안을 다스렸다.

그가 보인 실용적 감정은 회복을 향한 한 방식이었다.

둘 다 생존적 반응이지만, 감정의 방향이 달랐다.

나는 상실과 불안을 내부화했고, 그는 그것을 외부화해 책임으로 바꿨다.


이 차이 때문에 내가 더 오래, 더 깊게 불행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나의 불안은 반복적이고 자기 확증적이었다.

누군가가 떠나면 나는 먼저 '다시 떠날 것'이라는 전제를 세웠다.

그래서 때로는 관계의 부담을 스스로 키워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의 부재를 버텼다.

나는 감정의 무게를 붙잡으로 서 있었고, 오빠는 그 무게를 짊어지고 걸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기까지, 나는 수없이 흔들렸다.

아니 어쩌면 여전히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조카도 자식이야"라고 말하던 사람들, 막내외삼촌과 숙모였다.


그들은 나의 '두 번째 부모'였다.

엄마의 빈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자리를 허공으로 남기지 않게 붙들어준 사람들.

그 덕에 나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다른 방식의 어른'을 배웠다.

일상의 소소한 행동,

주말마다의 밥상, 스시를 가르쳐주던 침착함, 공부를 봐주던 인내,

이것들은 단지 편의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관계가 사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준 교육이었다.


좋은 어른 한두 명을 만나는 일은 사람의 삶을 바꾼다.

그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신뢰를 복구하고, 세상에 대한 기댓값을 재설정한다.

삼촌과 숙모가 내게 주신 것은 '모델'이었다.

어른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책임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나는 지금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누군가의 상실을 마주했을 때 수평적인 방식으로 반응한다.

그들이 준 온기와 가르침은 내 삶을 영유하는 힘이었고, 나는 그 힘으로 누군가에게 조금 다른 어른이 되기를 연습한다.

그게 내게 남은, 그리고 앞으로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보답이다.


엄마의 부재가 내게 남긴 건 공허함이었지만, 그 공허를 메울 수 있는 건 결국 따뜻한 '일상'일 것이다.

어쩌면 삶이라는 건 '일상'을 지켜내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적은 살아내는 사람에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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