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처럼 과일을 들고 오시던 외할머니

허기를 안고 살아가는 나날들

by Dear Mi

우리 엄마는 4남매였다.

오빠 둘과 남동생 하나, 그리고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딸내미였다.

엄마 아래로 이모가 한 분 계셨다고 들었는데 어릴 때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가 뱃속에 있던 시절 외할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고, 그 뒤로 혼자가 된 외할머니는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서울에 올라오실 때면 경기도의 아들 집, 서울의 딸 집을 번갈아 다니셨지만, 외할머니의 우편물은 늘 우리 집으로 왔다.

엄마가 그만큼 중심이었고, 우리 집에 외가의 기둥이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외할머니보다 친할머니가 더 많이 우셨다.

그 장면이 오래도록 가슴에 박혔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에 슬픔을 다 쏟아내고 갔고,

또 누군가는 미처 내려놓지 못한 슬픔을 품은 채 살아간다.

외할머니의 눈물은 충분치 않았다.

그 눈물은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그녀의 삶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날은 5월이었지만 이상하게 추웠던 기억이 있다.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그 자리에 따스함은 없었다.

아무리 울어도 배고프지 않았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았으며,

잠을 자도, 깨도, 모든 게 꿈같았던 시간.

장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설렁탕을 먹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빠의 첫마디는 "배고프다, 밥 먹자"였다.

그날 고모는 아빠를 안고 한참을 우셨다.

아빠의 허기짐은 단순한 식욕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아빠는 늘 채워지지 않는 공복과 함께 살아왔다.


장례식 이후에도 외할머니는 가끔 우리 집을 찾으셨다.

손주들이 보고 싶다며 오실 때면, 항상 과일을 사들고 오셨다.

그 과일은 늘 손님이 건네는 인사 같았다.

외할머니에게 우리 집은 더 이상 딸의 집이 아니었고,

우리에게 외가는 점점 낯선 곳이 되어갔다.

그리고 더 이상 외할머니의 우편물은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오신다는 연락이 오면 아빠는 항상 집을 비우셨다.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몇 봉지의 과일이 오가다 그 발걸음도 끊겼다.

서서히, 내게서 외가라는 뿌리가 사라졌다.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늘 과일 봉지가 생각난다.

투박한 비닐봉지 안에는 달고 시큼한 맛이 있었다.

외할머니의 존재도 그랬다.

입안에 오래 남는 달고 시큼한 맛처럼,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이젠 과일봉지도 외할머니도 없다.

아빠의 죄책감과 외할머니의 상실, 그리고 무심함이 엉켜 결국 우리는 각자 흩어졌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함께 잃어버린 채 또 다른 상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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