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복보다 상복을 먼저 입었다

익숙한 모든 것이 사라진 순간

by Dear Mi

음력 문화가 남아있는 우리나라엔 24절기가 있다.

꽃피는 봄이나 낭만 짙은 가을을 기다리며 기상캐스터가 입춘과 입추를 언제 알릴지 귀 기울이고,

팥죽 먹는 날이라며 밤이 긴 동지를 보내기도 한다.

점점 사라지고 있는 전통이지만 아직 어르신들은 절기에 맞춰 음식을 차린다.


24절기 중 여덟 번째. 그날은 소만이었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되어 보리가 익고, 모내기를 시작하고, 쌍둥이자리가 열리는 날.
그날 엄마가 쓰러졌다.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하셨다.

가족끼리 외식도 자주 했지만, 뭐든 사 먹는 것보다 엄마 손맛이 좋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갔더니 엄마는 나물 다섯 가지를 무치고 계셨다.

뭐 오늘이 나물 먹는 날이라던데, 왜인지는 몰랐다.

나물에 환장하는 딸이어서 엄마는 저녁 먹자고 눈을 반짝이셨지만, 한창 친구들이 좋았던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날따라 친구 집엘 가겠다고 했다.

내심 서운한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지.

중학생 아들은 학원에 있었고, 아빠는 비즈니스 미팅이 길어져 늦는 날이었다.

그날, 엄마의 저녁 메뉴는 나물과 막걸리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학원으로 전화가 왔다.

오빠였는지 아빠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저 지루한 수업을 빨리 마친다는 생각에 가볍게 집으로 향했다.

1층이었던 우리 집 현관문은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문에서 거실까지, 바닥엔 두 줄의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집에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아빠와 오빠는 이미 병원으로 가고 큰고모가 와 계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도 병원으로 향했지만, 그때까지도 큰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평생 아픈 적이 없던, 건강한 사람이었으니까.

월요일이었다. 구급 베드 자국만이 남은 집을 뒤로하고 엄마는 응급실로 떠났다. 이틀 뒤, 수요일엔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의 호출로 조퇴했고, 두 번째 수술을 지켜봤다.

그리고 일요일 새벽, 잠에 들면 업어 가도 모를 내가, 이상하게 눈이 떠졌다.

화장실로 향했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주저앉았다.

"엄마가 돌아가셨어."


정신을 차려보니 장례식장이었다.

나는 교복보다 상복을 먼저 입었다.

엄마의 병명은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었고, 두 번의 수술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죽는다는 게 뭔지 잘 몰랐던 나이.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적게 운 사람은 나였던 것 같다.

자식 둘을 두고 홀로 남겨진 아빠의 눈은 공허했고, 그나마 나보다 조금 더 자란 오빠는 나름 상주라며 연신 맞절을 해내었다. 의외로 외할머니보다 친할머니가 많이 우셨다.

그리고 모든 어른들은 내게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말만 건넸다.

"울지 마, 힘내." 그들은 울면서, 왜 나한테는 울지 말라고만 했을까.


그날 이후, 나의 삶은 서서히 달라졌다.

마의 어깨너머로 구경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밥을 차렸고, 청소기와 세탁기를 다루는 법을 익혔으며,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울먹이며 던지는 위로에 나는 "괜찮아요"하며 웃어 보이는 법도 익혔다.

그렇게 성격도 조금씩 달라졌다.


동정으로 주어지는 관심과 위로는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

족이 아닌 이들에겐 한두 계절, 친척들에게도 1년 남짓.

머지않아 누군가에겐 가십이 되고, 남은 가족에게는 원망의 대상이 된다.

"명 짧은 며느리가 들어와, 아들만 불쌍하게 됐다"

그 말이 내게도 들렸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내 첫 장례식은 한 편의 여행 같았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였고, 이제껏 보지 못한 광경을 겪었으며,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평생 만나본 사람보다 많은 얼굴을 마주했고, 인간의 선함과 이기심을 동시에 존재한 공간이었다.

2박 3일의 장례식, 그 시계는 분명 72시간을 가리켰지만 시간은 그보다 더 길게 흘렀다.

그리고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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