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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miyou May 07. 2020

슈퍼맨의 술버릇

가끔 든든한 나의 슈퍼맨에게도 내려와 쉴 곳이 필요할 테니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아빠는 술을 자주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하게 취해 들어온 아버지에게서 받은 용돈을 자랑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빠는 동창회 후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에도 방문을 열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지갑을 열어 턱 하니 배춧잎을 손에 쥐여주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과묵한 우리 아빠는 주사마저도 조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 처음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순간에서야 아빠의 술 취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어른 세계에 첫발을 내딛던 설렘은 제 주량이 얼만지도 모른 채 고주망태가 된 친구들에 의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듣도 보도 못한 주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제야 나는 아빠의 붉어진 얼굴과 행동이 그의 술버릇임을 알았다. 검은 얼굴에 붉은 취기가 오르면 말이 꼬였다. 그의 주사를 눈치챈 후로 달아오른 얼굴이 불편했고 반복되는 말들이 지겨웠으며, 어눌해진 말투가 듣기 싫었다. 얼굴에 취기가 오르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엄마의 고성이 싫었기 때문일까. 그보다 평소 말이 많지도, 어눌하지도 않은 아빠의 모습이 사라지고 낯선 이의 모습이 보이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홀로 놓인 그의 술잔을 뺏어 들며 “식탐 대마왕아, 그만 잡숴.” 하고 잔소리를 했다. 혼자만의 술자리를 방해하는 잔소리꾼이 하나 더 늘자 그는 멋쩍은 얼굴로 술잔을 만지작대다 자리를 정리했다.


  

그런 그가 취해서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던 엄마가 매운 음식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집 앞 매운 닭발집의 단골이 되었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적어도 한 번은 닭발을 사다가 막걸리 잔을 부딪쳤다. 어김없이 달아오르는 얼굴에 엄마의 싫은 소리는 여전했지만, 유일하게 넉넉히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 둘만의 자리에 아주 가끔 내가 낄 때도 있었다. 서로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짝꿍’이 자리를 비웠을 때다. 나는 종종 그들의 짝꿍이 되어 마주 앉았다.


  


아빠의 짝꿍이 되었던 어느 밤, 양파가 둥둥 떠다니는 탕 속의 조개를 집어먹으며 나는 적막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주로 사소한 일상을 늘어놓을 뿐이었으나 홀로 닭발을 집으려 했던 아빠 앞에서 재잘거려주는 것이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혼자서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운 아빠의 얼굴이 붉어진 것도 모른 채, 돈 벌기가 참 쉽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였을까. 듣고만 있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처음이었다. 아빠가 당신의 얇아진 주머니 사정을 직접 털어놓은 건. 자신의 형제들 앞에 서기가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를, 늙은 어머니에게 회 한 접시 대접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지갑 이야기를 꺼낸 게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언제나 나의 슈퍼맨이었던 아빠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 순간 30대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아빠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이 눈에 띄었다. 듬성해진 정수리가 보였다. 아빠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작아져 버린 50대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벌겋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어눌한 아빠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의 주머니 사정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여전히 천진한 아이인 척 넘어가고 싶었다. 그게 자식 된 도리라고 변명했지만, 사실 그 짐의 무게를 넘겨받기가 겁이 났던 거다. 방문 앞에 붙어 ‘아빠, 만 원만’ 하던 어린 애로 남고 싶었다. 당신들의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을 나눠 들면 정말 어른이 된 것만 같아서, 아직 준비되지 않은 채로 어른이 되었다는 걸 인정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내게 당신들의 고민을 내려놓을 때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실없는 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영원히 어리기만 한 딸이고 싶은 내게 그들은 자꾸만 자신들의 짐을 나눠주었다. 펄펄 끓는 조개탕 앞에서 쪼그라든 아빠와 무거워진 딸은 다시 한번 술잔을 부딪쳤다.


  


얼른 자리를 파하고 싶어 말없이 다리만 떨었다. 먼저 문을 열고 나가 시큰한 코를 훌쩍이며 신발 앞코를 툭툭 바닥에 찧었다. 취중에 오고 간 말들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아빠와 팔짱을 끼고 집으로 걸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어깨 위로 아빠의 묵직한 팔이 올라왔다.

  

“잘해라, 알겠나.”

어눌하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한마디로 그는 다시 당신의 무게를 내게서 떼어갔다. 코가 빨간 채 집으로 향하는 그를 보며 다짐했다. 마음이 힘든 저녁이면 맥주 캔을 따는 내 아버지의 단단한 술친구가 되어줘야겠다고. 종종 그의 편이 되어주겠노라고. 가끔 든든한 나의 슈퍼맨에게도 내려와 쉴 곳이 필요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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