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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Oct 10. 2019

미국연방대법원에서 본 공간 심리

건축이 권위를 얻는 방법

충청북도 변호사협회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미국연방대법원 정문 앞에 앉아있는 정의의 묵상과 법의 수호자 (일러스트 : 필자) 


"오이예이*, 오이예이, 오이예이" 

세 번 반복되는 소리로 누군가 법정 안 공기를 흔들었다. 이어 "미합중국 대법관에게 용무가 있는 모든 이는 가까이 와서 집중하라. 신이시여. 미합중국과 대법원을 보살피소서."라는 외침으로 재판이 시작됐다. 미합중국 연방 대법원에서 변론하는 게 평생 꿈이었던 한 변호사가 아홉 명의 재판관 앞에 서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한다. 변호사는 잘못된 판결이 수두룩한데 지적장애를 가진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린 건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내용으로 변론을 시작했다. 이어 재판관은 아동 강간이라는 사안을 잊지 말라고 재차 강조하며 국민 여론이 매우 나빠 사형시키자는 국민 합의에 대한 신뢰를 우리는 지켜야 한다고 변호사에게 말한다. 그러자 변호사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판관님들은 선입견을 품고 이미 모든 걸 결정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며 오히려 그들을 되려 질책한다. 

**오이예이(Oyez)는 ‘존중하는 마음으로 삼가 들으라’는 뜻으로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다.
드라마 보스턴리갈에서 엘렌쇼어가 변론하고 있는 장면

한 대법관이 변호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그런 행동을 하는 거냐고 묻는다. 변호사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며, 자신은 미합중국 연방 대법원에 서 있고 이곳에 무한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대법원의 서쪽 입구를 보면 '법 아래 평등한 정의(Equal Justice Under Law)'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동쪽 파사드에는 자비로 만들어진 정의를 의미하는 조각상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법 아래에선 누구나 평등하니, 흑인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잘못될 수도 있는 판결을 다시 한번 더 들여다 봐주시길 간청했고, 이곳에서 그 자비가 실현되길 바란다고 말하며 변론을 마무리한다. 이 이야기는 미국드라마 '보스턴 리걸'에 나오는 변호사 엘런 쇼어 대사의 일부이다. 


미연방대법원 (출처:wikimedia)

극장 간판처럼 법 아래 정의는 평등하다고 입구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35년에 국회의사당을 지은 미국 건축가 '카스 길버트'에 의해 지어졌다. 법원 건축은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는데 전면부는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에꼴 드 보자르, 신고전주의)으로 짓고, 법정 공간은 내부로 감췄다. 당시 법원 건축은 좌우대칭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마치 왕좌에 앉아있는 왕과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미국 드라마에서 흔히 대법원 장면을 볼 수 있다. 그곳은 아주 엄숙하다. 하지만, 대법관들이 법복을 벗고 식당 테이블 앞에 줄줄이 앉아있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그곳이 엄숙한 공간이 될까? 모든 공간은 편리에 따라 기능대로 만들어야 하지만, 법 집행기관은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 바로 권위이다. 이것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렇기에 대법원에서는 권위를 심어줄 많은 장치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이야기’이다. 경외심을 갖게 할 수 있게 국민들에게 환상을 심어줘야 한다. 이를테면 동화나 신화같은 이야기를 담아 대중들에게 거대한 우상처럼 보여야 한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아주 오래전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생겨났다. 그때 건축물은  꽃이 피지 않은 기둥이 없었는데, 그 형상을 코린트 양식이라고 불렀다. 이 건축양식을 가져온 미국은 위대한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상징성을 더욱 부각했다. 건물의 동쪽 입구는 16개의 거대한 기둥이 지붕처럼 생긴 삼각형 페디먼트를 떠받들고 있는데, 거기 질서와 자유의 여신 그리고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 세 명과 대법원을 만든 인물 여섯 명이 조각되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입구 왼쪽에 정의의 묵상(Contemplation of Justice)이라는 여인 조각상이 있다. 그녀의 한 손에는 법전이 들려있고, 다른 한 손에는 눈을 가린 채 저울과 칼을 든 여신 테미스가 들려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굉장히 심사숙고해 보인다. 그리고 입구 오른쪽에는 법의 수호자(Guardian of Law)라고 불리는 남자가 LEX(법률)가 새겨져 있는 비문과 칼을 들고 앉아있는데, 곧장 일어나 달려들 것만 같다. 두 조각상 사이에 있는 계단을 올라 입구 앞으로 가면 커다란 청동 문이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 문은 마치 피렌체 두오모의 ‘천국의 문’과 흡사하다. 청동 문은 아킬레스의 방패부터 시작해서 1803년 미국국회의사당 앞 존 마샬 대법관의 이야기까지 정의가 형성되고나서 서양법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여준다. 건물의 뒤편인 서쪽 파사드는 각 시대에 법률을 제정한 모세와 공자 그리고 솔론이 머리 위에 조각되어 있다. 거기다가 대법원은 값비싼 대리석으로 모조리 덮여있어 대리석 궁전(Marble Palace)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건축물 전체가 이야기로 완벽하게 치장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대법관들도 법복을 입는 순간 저스티스(justice)라고 불리며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높은 자리에 앉는다. 그렇게 법은 신격화되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신화와 역사로 가득 채워 일단 건축스토리는 탄탄하게 완성되었다. 
시계방향으로 정의의묵상, 법의 후소자, 서쪽 페디먼트, 동쪽 페디먼트 (출처 : flickr)


두 번째는 ‘규모’이다. 아주 크고 웅장한 왕궁처럼 만들어 사람들을 규모로 압도해야 한다.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면 어마어마하게 크고 높은 스케일에 비해 자신은 한낱 미물같이 느껴져 겸손해지고 또 겸손해진다. 

규모로 압도하는 공간

세 번째, ‘신성성’이다. 대법원의 공간은 성당의 바실리카와 흡사하게 만들어져 있어 들어갈수록 몰입도가 극적이다. 르네상스의 예술작품들을 보면 성경을 이야기하거나 신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완벽한 신을 닮아가고 싶은 인간의 바람이 보인다. 앨런 역시 대법원에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서 보고 싶어 한 마음이 이해된다.  

신성성은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네 번째, ‘위치’이다. 양옆으로 열주가 늘어서 있는 홀의 끝은 대법원의 하이라이트인 재단과 같은 법정이 있다. 법정의 가장 안쪽은 아홉 명의 대법관이 앉는 공간이자 대법원에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을 판단을 할 수 있는 절대 힘이 있는 고매한 자리이기 때문에 위치상 사람이 서 있는 곳 중에 가장 높다. 광장에서 입구와 홀을 통해 마지막 법정에 들어설 때까지 공간은 점점 높아져만 간다. 매 걸어 들어가는 순간마다 높아져 가는 공간에 저도 모르게 심리적으로 더욱 긴장하게 된다. 그리고 조각상과 같이 법과 관련한 상징적인 모든 것을 눈높이보다 위로 배치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우러러보게 했다. 이런 장치들로 인해 대법원 건축은 비로소 완성된다. 

단계적인 공간의 상승은 심리적으로 긴장과 몰입을 가져다 준다. 
왼쪽부터 대법원을 올라가는 계단, 그레이트 홀, 대법원 법정



연방 대법원은 미국정부가 생겨나고 147년이 지난 후에나 겨우 만들어졌는데, 완공되는 날 초석에는 

‘공화국은 견뎌냈고, 이것은 믿음의 상징이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대법원은 뚝딱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건물을 세우려고 오랜 시간동안 노력하고 다듬었다. 권위라는 건 큰 노력과 시간을 들여 다듬어진 보석과 같다. 하지만, 주변을 보면 그저 크게 우뚝 세워 위압감만 주는 법원 건축들이 종종 보인다. 큰 몸집만 있고 어디에도 이야기와 철학을 볼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권위를 덩치만 앞세워 힘으로만 얻으려고 한다. 권위는 믿을만한 신뢰가 있을 때 존경심과 더불어 비로소 만들어진다. 그렇게 쌓인 묵직한 무게감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권위이다. 

우리가 그들을 높은 곳에 올린 이유는 아래로 내려다보지 말고 멀리 내다보라고 올려놓은 것이다. 결국 모든 걸 공평하게 바라봐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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