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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Nov 10. 2020

프랭크로이드라이트의 사랑과 전쟁, 비극의 집, 탤리에신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집

탤리에신 이스트 / 건축의 탄생에서

1914년, 미국 위스콘신에서 한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는 끔찍한 방화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해고를 당한 저택의 집사 줄리안 칼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집주인이 출장을 간 사이에 문 하나만 열어놓고 집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집 안은 온통 아비규환이었다. 칼톤은 출입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안주인와 그녀의 두 자녀 그리고 네 명의 일꾼을 차례대로 하나씩 도끼로 내리찍어 죽였다. 칼톤을 피해 창문으로 몸을 던져 가까스로 빠져나온 나머지 두 명시내로 달려가 경찰에 신고했다. 몇 시간 후 경찰은 저택 지하에서 염산을 마신채 쓰러져있는 칼튼을 발견하고 즉시 체포했지만, 칼톤은 식도가 망가져 아무 것도 먹지못해 몇 주 후에 결국 굶어 죽었다. 칼톤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칼톤의 아내 말에 따르면, 편집증이 갈수록 심해져 몇 주 전부터 가방 안에 항상 도끼를 들고 다녔다고 했다. 사건이 벌어진 날, 시카고에서 출장중이었던 집주인은 친구에게서 자신의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건 불에 타 죽은 가족의 시신 뿐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 대서특필되었다. 집주인은 훗날 구겐하임 미술관과 낙수장을 지은 미국의 대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였고, 불에 타버린 주택은 1911년에 그가 지은 탤리에신 이스트였다.


집사 칼톤이 탤리에신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 / 건축의 탄생에서



*한국건설기술관리협회(KASEM)에 기고한 글입니다.

탤리에신의 방화살인 기사 / virtute.io


라이트는 22살이 되던 어린 나이에 건축가가 되려는 큰 꿈을 가지고, 미국 건축의 중심에 있었던 시카고 학파의 수장 루이스 설리번 회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라이트는 곧바로 캐서린 (Martha Borthwick Cheney)과 결혼해 20년동안 자녀 6명을 두고, 시카고 오크파크에 자신의 집을 짓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라이트의 하우스&스튜디오는?
라이트의 하우스&스튜디오 / wikimedia
가족과 함께 찍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젊은 시절 / flwright.org
라이트의 하우스&스튜디오(Wright's House & Studio)로 이름을 붙인 주택은 라이트의 아내와 함께 여섯 명의 자녀를 키운 집이자 작업공간이다. 전통적인 퀸앤양식에서 라이트의 전매특허인 프레리 양식으로 발전한 라이트의 작업실이자 집이다. 라이트의 하우스&스튜디오는 라이트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프뢰벨 블록의 형태를 기반으로 설계해, 삼각형 지붕과 사각형 및 다각형 평면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프뢰벨 블록
박공지붕의 퀸앤양식에서 프레리양식으로 확장된 라이트의 하우스&스튜디오 / 건축의 탄생에서
라이트의 하우스&스튜디오는 자동차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집에 차고를 설치한 최초인 건축물이다. 라이트는 1909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꾸준히 건축실험을 하며 집을 변형해나갔다. 라이트의 하우스&스튜디오는 현재 미국 국가사적지,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결혼한 지 20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라이트는 자신의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집 2층을 기숙사로 개조해 세를 놓고는 가족에게 유럽으로 출장을 간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집을 떠났다. 당시 여자문제가 복잡한 라이트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낌새를 느낀 황색언론은 라이트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결국 한 기자의 집요한 추적 끝에 라이트의 이중적인 행적이 드러났다. 결혼생활에 싫증을 느꼈던 라이트는 자신의 건축 의뢰인이었던 마마 체니라는 여자와 함께 세간의 이목을 피해 유럽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타국에서 1년이라는 도피생활로 고향이 그리워진 라이트는 체니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마마 체니 / wikipedia, historic.com


라이트는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그의 어머니 명의로 위스콘신 스프링 그린에 있는 땅 200에이커를 사들여 체니와 함께 살기 위한 집을 지었다. 라이트는 집을 '빛나는 이마'라는 뜻을 가진 고대 영국 웨일스 시인의 이름을 따 '탤리에신(Taliesin)'이라고 지었다. 라이트는 탈리에신을 사랑의 집 (Love Cottage), 사랑의 성(The Castle of Love)라고 언론에 기사화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포장했지만, 다른 여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라이트에게 돌아온 것은 주변의 수많은 비난 뿐이었다. 주민들은 이 지역의 그릇된 남녀의 관계를 우리 아이들이 보고 자라게 할 수 없다며, 비도덕적인 라이트를 간음죄로 당장 체포하라고 수도 없이 경찰에 요청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그에 대해 예술을 하는 남자는 두 명의 여자가 필요하다고 대응했다. 두 명의 여자 중 하나는 아이를 키워줄 여자, 또 하나는 정신적인 동반자로서 영감을 얻게 해줄 여자라고 그는 말한다. 이어서 그는 법과 규칙이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고, 규칙없이 사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은 강요받는 것이라며 이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을 일축했다.


그렇게 라이트는 탤리에신에서 체니와 새로운 삶을 시작해려는 듯 했지만, 얼마 후, 피해의식이 가득한 한 사람이 저지른 끔직한 방화살인사건으로 라이트의 삶은 다시 엉망이 되었다.

  



탤리에신 이스트는?


온갖 큰 사고와 여자문제로 얼룩져 있던 라이트가 지은 집은 아이러니하게 언제나 화목한 가정이라는 것을 염두하고 지어졌다. 탤리에신은 고향 위스콘신의 스프일그린 계곡 언덕 위에 지어진 주택 건축물이다. 새 삶의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이주한 외조부처럼 라이트는 여기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다. 라이트가 추구한 이상적인 집인 *프레리 양식의 완성작이다.
위스콘신에 위치한 탤리에신 이스트 / 건축의 탄생에서
탤리에신 이스트  스케치 / 건축의 탄생에서

 

아시아에서 생산된 미술품 수집이 취미였던 라이트는 탤리에신 이스트 내부와 외부 모든 곳에 미술품을 배치해 건축물 전반으로 동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건축물의 면은 대지 주변에서 나는 화강석을 이용했고, 지붕은 주변 나무와 어울리게 실버그레이로 채색했다.지역 특성상 추운 곳이어서 햇빛이 하루종일 내부로 유입되도록 많은 곳에 창을 배치했고, 배관이 얼어붙기 쉬워 외부에는 배수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프레리(Prairie) 양식 :  미국 도시의 급격한 발전과 인구 증가에 따른 반발로 나타난 양식.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길고 낮은 전원주택 형태로 지어진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건축의 한 갈래. 


아름다웠던 자신의 집과 가족 모두 잃게 되자 라이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무너진 탤리에신을 재건해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미친 듯이 일을 해 큰 아픔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 때 라이트를 도와준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한 명은 파리에서 추방된 유명한 조각가인 미리엄 노엘이라는 여자였고, 또 한 명은 자신의 집안 일을 도와주는 넬리 브린이라는 여자였다. 그 둘은 재건된 탤리에신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성격이 맞지않아 언제나 부딪혔다. 어느 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넬리 브린은 서류정리를 하다가 라이트와 미리엄의 성적으로 민감한 내용으로 쓰여있는 러브레터를 보고, 자신의 도덕적인 종교관과 맞지않다고 생각해 편지를 언론에 공개하고 만다. 거기다가 추방당한 미리엄을 데리고 온 불법행위를 신고한다. 이는 연방법에 어긋난 중범죄에 해당되었다. 힘들었던 자신을 언제나 보좌해 굳게 믿었던 넬리 브린의 돌발행동에 크게 당황한 라이트는 곧장 변호사를 불러 대응했고, 결국 그의 혐의는 기각되었다.


이 소동이 끝이 나자 곧 일본에서 호텔을 건축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호텔이 완공되자 곧 일본에서 1923년 9월1일에 진도 7.9로 기록된 일본역사상 가장 큰 지진인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는데, 라이트가 지은 호텔만 제외한 모든 건축물이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이 호텔은 라이트를 세계적으로 이름을 다시 크게 알릴 기회가 된 건축이 되어 라이트를 깊은 나락에서 건져냈다.

일본 데이코쿠 호텔(제국호텔) / wikipedia


데이코쿠 호텔을 완공하고 라이트는 미리엄과 재혼을 하면서 탈리에신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문제가 있었다. 안정된 삶을 원했던 라이트는 미리엄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그녀는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마약중독자였다.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미리엄은 라이트를 떠나 자신의 친구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더 쉽게 마약에 노출되었다. 미리엄과 서로 오래 떨어져 있던 라이트는 곧 올기바나라는 26살의 어린 유부녀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라이트는 57세의 중년이었다. 라이트와 올기바나의 삶이 시작될 때쯤, 번개가 떨어진 건지 전화 배선이 잘못된 건지 모를 전기문제로 화재가 일어나 탤리에신의 주택부분이 전소되었다.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미술수집품과 설계도가 모두 불타버렸다. 당시 세계는 대공황이어서 라이트는 재정적인 타격을 정면으로 받았다.

미리엄과 올기바나 / steinerag.com

거기다가 라이트는 미리엄과 관계정리가 필요해 이혼을 신청했던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라이트의 새로운 연인인 올가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에 격노한 미리엄은 라이트가 머무는 호텔을 찾아가 로비에서 자신은 학대당했다며 난동을 부렸고, 라이트가 그녀를 피해 있던 곳에 몰래 찾아가 물건을 모두 부시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리엄은 라이트가 올가를 미네소타에서 위스콘신으로 데려간 것은 연방법에 어긋난다며 당국에 고발했고, 탤리에신 화재로 빚이 있었던 라이트를 신고해 그의 수집품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압류시키고 만다. 미리엄때문에 라이트는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었다. 결국 라이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위자료를 미리엄에게 건내 서로 이혼에 합의하고, 집요하고 길었던 이혼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라이트는 건축 실습생을 가르치는 탤리에신 펠로십을 만들어 재정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경매에 넘어갈 뻔했던 탤리에신을 다시 사들였다. 이후 탤리에신 웨스트에서 라이트는 *유소니언 하우스를 만들어 미국 전역에 보급했고, 그의 걸작 중 하나인 낙수장을 지으면서 그의 건축가 인생은 보다 견고해졌다. 시간이 흘러 70대의 노년에 접어든 라이트는 폐렴이 심하게 찾아왔다. 그는 따뜻한 애리조나 스코츠테일에 탤리에신을 이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은 말 그대로 모래 뿐인 사막이었지만, 임시작업장을 만들어 그의 펠로들과 함께 수많은 실험과정을 거쳐 탤리에신 웨스트를 완성했다. 그곳에서 라이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세 번째 부인 올기바나와 함께 지냈고, 시대의 걸작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으면서 그의 삶을 92세로 마감했다.


*유소니언 (Usonian) : 새뮤얼 버틀러의 유토피아 소설 <에레혼 Erehwon,1917>에 나오는 미국을 뜻하는 말 '유소니아(Usonia)'에서 따왔다. 라이트는 종종 미국을 유소니아로 언급했다.  





탤리에신 웨스트는?


추운 탤리에신 이스트가 있던 위스콘신에서 애리조나로 옮겨 지은 탤리에신 웨스트. 이곳은 젊은 건축학도의 연구소이자 실습장이 되었다. "건물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건설해야 하는 것이라는 라이트의 이념이 반영되어 1937년부터 1959년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건축물이다. 식당이 있는 다목적 공간 키바(Kiva)부터 시작해 주설계실, 문서고, 사교장, 전용 스튜디오, 게스트하우스를 차례대로 만들었다. 특히 문서고는 탤리에신 이스트와 같은 화재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콘크리트로 만들고 메인 건물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았다.


아리조나에 위치한 탈리에신 웨스트 / wikimedia


탈리에신 웨스트 배치도 / 건축의 탄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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