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BHC의 신메뉴, 치퐁당 광고는 소름 돋을 정도였다. 아직까지 전지현이 닭다리 앞에서 깨방정을 부리다니. 물론 이해할 수 있다. 그건 ‘엽기적인 그녀’의 시그니처 무브니까. 내가 기억하는 전지현은 늘 상큼하고 발랄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 42살. 애 둘 엄마의 애교를 보아하니,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가 손 끝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 같았다. 세상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 이건 말 그대로 엽기였다. 여전한 미모에서 전해오는 방부제의 향기는 김건희 여사의 그것과 묘하게 닮아가고 있었다.
데뷔 이후 전지현은 CF계의 거물이었다. 동시에 충무로의 흥행 부도 수표였다. “여친소”, “데이지”, “블러드”처럼 큰 예산이 투입된 작품에서, 주연을 맡은 족족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한번 재미 봤던 이미지는 그대로 복제됐다. 책을 낭독하는 듯한 발성은 고쳐지지 않았다. 가끔은 발연기로 저명했던 미인들의 근황을 떠올려보곤 한다. 태양처럼 눈부셨던 외모, 그 미모가 전부였던 이들은 불혹으로 접어들면서 소리 소문 없이 상장폐지되곤 했다. 한때 천하제일미로 이름을 날렸던 김태희와 한가인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안마기기 옆에 서서 포즈를 취하거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추억팔이나 하고 있지 않았던가.
자칫하면 라네즈와 엘라스틴의 얼굴 마담으로 커리어를 마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책에 이름을 새길 톱스타라면 한 번쯤 귀인을 만나는 법이다. 최동훈 감독이 전지현에게 그러했다. 이 만남은 천만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전지현의 섹스어필을 한국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네 번째 장편 “도둑들”은 쌍두마차로 김혜수와 전지현을 배치했다. 전지현은 글래머였나?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래서 김혜수의 묵직함에 주눅들었는가? 이 역시 당치 않은 견해이다. 대신 호리호리한 라인과 육감적인 각선미는 숫한 남성들을 애간장 태우게 해 더욱 안달 나도록 만드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는 강남 3구 슬렌더 여성들이 간절하게 꿈꾸었던 이상향과 같았다.
하늘 맑은 이른 아침 출근길에 둘러봤다. 아파트 쉼터에 핀 매화는 여전히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그 자태는 십 년 전보다 더욱 성한 것 같았다. 허나 내가 매화보다 감탄해 마지않았던 전지현의 섹스어필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못된 심술을 부린 걸까. 출산의 고통은 이토록 매정하게 뒤끝을 보여야만 했나. 2021년 긴 공백을 마친 뒤 드라마 “지리산”으로 복귀했을 때, 연달은 악재들은 대중의 실망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태평양물산, 에이스토리의 주가 폭락. 네파의 광고 계약 해지. 한소희로의 모델 교체… 그래서인지 요즘 그녀에게서 돋보이는 것은 혹독할 정도의 자기 관리이다. 그것은 시간을 거스르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여자는 아름다울수록 젊음을 길게 유지하고 싶어 한다. 타인의 갈망하는 듯한 시선에 이미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춘을 붙잡고자 굳게 결심을 하더라도 한낱 인간이 어찌 세월의 흐름을 피해 갈 수 있단 말인가. 꽃은 시들어도 다시 필 수 있다. 전지현도 그러한가.
나는 여배우를 좋아한다. 어릴수록 더 좋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배우의 예술은 결코 나이를 먹는 법이 없는 터이다. 분명 난 전지현을 좋아했다. “도둑들”의 샤워 가운만 입은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명장면, 나는 그 신을 수백 번 돌려봤다. “별에서 온 그대” 천송이는 넋을 놓고 바라봤다. 난 매일 김수현이 되고 싶었다. 화면에서 그녀가 살아있는 순간은 늘 자신감 덕이었다. 이 자신감은 호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던 미모에 대한 자아도취였다. 그런데 자아도취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시점에서, 그녀에게 기대할 게 크게 남아있지 않음을 최근에 깨달았다. 이제 닭다리 앞 주접을 목격하며 나는 그저 슬피 울 수밖에 없었다. 내 눈가는 어느새 눈물자국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끝내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