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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 May 03. 2024

멍 때림의 미학

"수술 전 검사"

수술을 결정하고 수술 전 검사를 받는 날. 혈액검사, 소변검사와 심전도, CT와 초음파 촬영이 종일의 스케줄이다. 아침부터 금식 4시간 이후 9시 30까지 내원하여 피검사를 마쳐야지만 CT를 찍을 수 있다. 생각보다 검사와 대기 시간이 많은 데다 주사 맞기를 끔찍이 싫어하다 보니 오늘의 검사들은 줄줄이 더 곤욕이다. *① CT실에서 조영제를 넣는 이유와 검사방법, 혹시 모를 후유증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사인을 하고 대기를 했다. 간호사 선생님 왈 주사가 두꺼우니 조금 아플 거라는 말이 더 나의 공포심을 자극할 법도 한데 이제 몇 가지 검사가 안 남았다 하니 조금만 더 힘을 내본다. 처음 해보는 CT촬영. 안내에 따라 누워 기계 안으로 들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공상과학 영화에 나올 법한 커다랗고 새하얀 돔 같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숨을 크게 쉬었다 멈췄다를 계속한다. 온몸이 후끈 꾀나 이상한 기분의 열기가 돈다.*② 






채혈 후 소변검사, 심전도에 CT까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검사를 하고 나니 허기가 졌다.


"여보, 우리 뭐라도 먹을까?"


몸에 들어오는 탄수화물만큼 마음의 안도감이 공급되는 것도 없지. 채혈 후 검사결과가 1시간은 있어야 나오기 때문에 짝꿍과 잠시 병원 내 스타벅스에 앉아 간단한 요기를 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제안했다. 창을 나란히 바라보는 자리를 좋아해 이를 잘 아는 짝꿍이 이미 내 마음에 딱 맞는 자리를 잡아두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간다. 종종걸음만으로도 바쁜 흰 가운의 의사들, 결과가 좋았는지 어떤 이들은 마스크 밖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얼굴 온 가득 화색이 돌고, 어떤 이들은 파르르 떨리는 서로를 안고 기대어 간다. 이를 보고 있자 하니 나의 마음까지 순간 납덩이처럼 무거워진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 대뜸 짝꿍 손을 꼭 잡았다.


"여보! 우리! 진짜 이제 아프지 말자"

"응 그래야지. 그러려고 수술받는 건데"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크림이 가득가득 찬 크림빵을 좋아하는데 아프고 난 뒤로는 특히나 자제 중이지만 오늘같이 애쓴 날은 나에게 좀 관대해질 필요도 있어. 따뜻한 커피 한잔과 크림카스테라(크림빵이 없어 대신 크림카스테라를 주문했다)를 포크로 푹 찔러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먹으며 생각한다. '수술하면 이제 이런 음식은 안녕해야지!' 하는 뻔하디 뻔한 다짐과 함께 나만의 생각에 또 잠긴다.


요즘은 멍 때리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일과 육아와 더불어 자기 계발까지 하겠다며 하루일과를 빈틈없이 꽉꽉 채웠던 날들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행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멍- 아이들 보내놓고 멍- 병원 와서 대기하며 멍- 예전엔 이런 시간이 참으로도 비생산적이고, 세상 할 일 없어 보인다 생각했었지. 하지만 웬걸 멍 때리기는 생각보다 생산적이고도 의외로 어렵다. 불멍, 물멍, 비멍... 오죽하면 멍 때기리기 대회란 것*③도 생겼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생각이 너무 많아 이 멍 때리는 몇 분 몇 초의 시간조차 견뎌내기 어려워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프고 난 뒤로는 아무 생각과 목적 없이 멍-한, 이 멍 때리는 타임이 내게 꽤나 소중해졌다. 멍 하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가슴 한편 꽉 채웠던 답답함이 소화제 먹듯이 뻥 뚫리는 듯한 해소감을 가져다주더라고. 가끔은 다 내려놓고 비워두자 멍...


멍... 크림빵과 짝꿍. 작은 안도감과 자신감을 얻어내는 순간의 것들이 지금 내게 있다.


마지막 초음파 검사를 끝으로 참으로 길었던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 됐다. 그나마의 멍 때림 덕분에 버틸만했어. 일과가 다 끝나고 나니 하루종일의 긴장이 단박에 사그라든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몸이 으슬으슬한 기분이 든다. 집에 가서 멍을 좀 때려야겠다. 멍 때릴 수 있는 지금의 특권을... 즐기자!






* 1. 주사공포증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3화 멈추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을 참고해 주세요.


* 2. 수술점검사: 혈액, 소변, 심전도, CT와 초음파 검사를 진행했어요.
1) 갑상선초음파검사: 초음파를 이용해 갑상선 내부에 결절 여부를 확인하는 가장 쉽게 하는 검사예요. 수술 전 한번 더 영상의학과 협업으로 진행됩니다. 2016년 대한갑상선학회 개정한 갑상선결절 조직검사 권고안에 따르면 최근에는 초음파 후 위험군이라 생각되더라도 1cm가 넘지 않는다면 조직검사를 권하지 않고 있습니다.

2) 혈액검사: TSH, T3, T4 등 혈액검사를 통해 갑상선자극 호르몬과 갑상선 호르몬의 혈액 내 농도와 그 이외의 기초 검사를 진행합니다. 갑상선기능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3) CT: 갑상선 및 주변조직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해 보기 위한 CT검사를 시행합니다. 갑상선 초음파 검사로 확인하지 못한 갑상선 내부의 병변이나 주변 림프절 전이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진행되며 초음파 보다 해상도가 좋아 확인 차원에서 진행하나 림프절 절이는 결국 수술 중 확인함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에 의료진에 따라서는 모든 갑상선암 환자를 대상으로 시행하지는 않습니다.


* 3. 멍 때리기 대회: 3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는 대회예요. 멍을 때리며 정말 몸이 이완이 됐는지 15분 간격으로 심박수를 체크합니다. 멍 때리기에 자신 있다면 가족들과 함께 보기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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