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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 Apr 25. 2024

갑상선, 헤어질 결심

"병원 초진과 선택"

초록.

교수님 성함이 예쁘다

내가 참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지


S병원은 거리도 가깝고, 교수님께서 실력도 좋은데 친절하시기로 너무 유명하단다. 혹여라도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라도 하려면 아이들 두고 짝꿍이 왔다 갔다 해야 하니 먼 병원은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명의가 있다 하더라도 제외하기로 했다. 30분 내외 거리의 두 곳을 예약하고 먼저 진료가 잡힌 S병원에 가는 날. 이상하리 만큼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다.


오후 2시 40분 초진. 오늘은 짝꿍과 훈이 학원을 보내놓고 등산을 했다. 묵묵하게 겨울 산을 오르며... 늘 잔잔하게 물 흐르듯이 나를 믿어주고 곁에 있는 짝꿍이 새삼 참 고맙다. 아직은 엉성한 민둥산이지만 군데군데 자연이 주는 기운의 위로는 늘 공짜인게지. 그간 체력이 바닥이 난지라 동네 동산 오르내리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래도 아침부터 병원 갈 생각에 심란하고 다소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지는 듯하다.

 

아이들 때문에라도 대학병원을 안 가본 것은 아닌지라 초진시간보다 서둘러 병원에 갔다. 투명파일에 차곡차곡 챙긴 서류와 영상등록도, 병원카드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대략 2시 조금 넘어 도착해 원무과에서 수납*①을 하고 영상을 등록한 뒤 카드를 만들어 주는데 내 이름의 병원 카드라니 낯설다. 드디어 교수님 대면시간. 갑상선 쪽으로 워낙에 유명한 교수님이기도 하고 슬기로운 의사생활 실사판이라는 평이 갑상선 동기*②들 사이에 파다해 궁금한 건 다 여쭤봐야지 하며 휴대폰 메모장*③에 빼곡하게 적어둔 화면을 꺼내 들었다.


"어서 오세요. 많이 놀라시고 힘드셨죠?" "수술은 누구나 안 하면 좋은데, 너무나도 아쉽게도 위치가 좋지 않네요... 협부로 끝낼 수 있을 수 있었는데 위치상 반절제는 해야 할 같아요" 자료를 함께 보며 차근차근 증상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교수님의 나 근한 목소리에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아낸다.


"어때요, 더 고민해 보시고 결정하시겠어요?" 교수님의 마지막 질문에 동시에 신랑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합을 맞춘 듯 주저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수님, 빠른 날짜로 수술 잡을게요" 결심을 하기까지 시간은 단 몇 초. 조금이라도 고민할 줄 알았지만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인 것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잘해 보겠습니다" 다정하면서도 강인한 목소리에 왈칵 볼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도감이랄까... 그냥 마음이 놓였다.


수술일자를 잡고 수술 전 CT예약을 잡았다.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원무과에 가라는 안내를 받아 수납창구를 마지막으로 갔다. 50만 원가량 되는 병원비가 중증환자*④ 등록으로 3만 원으로 줄었으니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네 하며 짝꿍과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나와 가족들을 믿는 것 말고는 할 것 없는 순간을 마주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가장 단단해지는 달이기도 하다. 갑상선과 헤어질 결심 뒤 그간의 근심과도 헤어지기로 했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잘 먹고 잘 자기. 짝꿍이 한동안 집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아이들을 보내고, 우리 둘은 신선한 제철 재료로 최소한의 양념을 하고, 그날그날 냉털(냉장고 털기) 재료로 무엇을 해 먹을까 고민하는 소소한 즐거움에 하루하루를 보낸다. 둘이 나란히 앉아 마냥 웃을 수 있는 쇼 하나를 보며 바보같이 깔깔 거리며 식사를 한다. 모두 따숩고 맛난 것들이 가득하다.


많이 웃고 있다. 회사에 육아에 모든 것에 틈이 없을 때에는 따뜻한 말보다 채근하기 바빴는데 노력으로 이렇게 많이 웃을 수 있구나 싶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각자의 절박함이 어디 없겠으냐마는 내 30대 마지막의 2월은 절박함과 절실함이 큰 만큼 더 내려놓고 더 많이 웃는다. 웃자!


서로 안아주는 일이 많아졌다. 쨍하리 만큼 날이 찬데 떨리는 서로를 안아주기 위함이었겠지. 응원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가슴 뜨거운 날들이 이어진다. 가끔은 그 품에 안겨 눈물짓기도 바보같이 웃어 보이기도 하는데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겨울이 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갑상선과의 헤어짐을 준비 중이다.




*1. 수납: 대학병원에서 수납은 최우선 과제. 환자 도착 등록 전 먼저 수납창구를 가서 수납을 합니다. 보통은 수납 후 다음 과정들을 차례로 밟기 때문에 오고 가고 헤매는 것을 줄일 수 있어요. (물론 진료 후 추가 검사나 금액이 책정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갑상선 동기: 05화. 전 이야기를 참고해 주세요.


*3. 질문은 메모하기: 질문거리를 사전에 메모해 가져가면 진료를 보며 당황해 묻지 못하고 그냥 나오거나 까먹을 일이 없어요. 큰 병원에서의 긴장감과 나의 증상을 마주하게 되면 생각해 간 것들을 다 까먹고 나오기 십상이거든요. 별거 아닐 것 같지만 매우 유용한 방법입니다.


*4. 중증환자 등록: 암환자라고 의사의 진단이 내려지면 중증환자로 등록을 할 수 있어요. 첫 진료 후 대부분은 병원에서 알아서 쉽게 등록신청을 해주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의료비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중증질환 특례제도로 암 치료비의 경우 5%만 부담하면 되기 때문에 미리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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