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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웨인 May 06. 2018

잠 못 이룬 까닭

풍경이 일렁인다

밤을 새웠다. 이유를 모르겠다. 이른 아침, 잠은 오지 않는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공기가 묘하게 파고든다. 지하철을 탔다. 역을 서너 개 지날 무렵 갈 곳을 정했다. 그제야 잠이 온다. 맞은편 광고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희미해 눈을 부릅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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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을 뵌 적이 없다. 아내와 막 사귈 무렵 돌아가셨다. 장인어른은 그때부터 혼자 사셨다. 손수 요리하고 청소하고 움직이고. 연세가 많은 지금껏 일하신다. 부지런하고 건강하시다. 그런 장인이 병원에 입원하셨다. 심장 수술을 하셨다고 들었다.


살가운 사위는 아니었다. 제 부모에게 못하는데 처가에 잘 할 리 없다. 잘 찾아뵙지도 못했다. 잘하건 못하건 탓하는 분이 아니셨다. 몰래 손을 잡아주시곤 했다. 딸 걱정에 애써 품어주셨나 보다. 강해야만 울림이 클까. 조용한 울림은 잔향이 길다. 내 아버지와는 다른 분이셨다.


서울대학병원은 처음이다. 본관 병실에서 오래된 냄새가 났다. 아무도 없다. 일찍 오길 잘했다. 2년 만에 뵙는다. 놀란 눈과 불쑥 마주쳤다. 정작 당신보다 내 안부를 물으신다.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 다리는 좀 어때. 얼른 나아야지. 어머님은 건강하시지. 괘씸한 사위의 늦은 문안을 허물치 않으신다.


뭔가 북받친다. 입을 여는 대신 당신 손을 잡았다. 많이 마르셨다. '저 하나도 안 바쁩니다. 계속 집에 있었어요. 몸도 마음도 아팠습니다. 많이 힘들었어요.' 대답과 질문이 입에서만 맴돈다. 당신께 숨긴 비밀이 있다. 죽을 때까지 뱉을 수 없을 거다. 고백이 치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장인은 말씀도 바르시고 괜찮아 보였다. 회진 온 의사 말도 긍정적이다. 곧 회복할 거라 이야기했다. 잡은 손을 놓고 인사드렸다. 단단하신 분이다. 투둑 털고 일어나실 거다. "퇴원하면 집으로 자주 찾아뵐게요."


등을 민 사람은 없었다. 오지 않았어도 욕할 사람은 없다. 그저 후회하기 싫었다. 도리 따위는 염두에 없었다. 잠 못 이룬 까닭을 알고 싶었다. 편하라고, 나 좋자고 한 일이다. 이기적인 나쁜 놈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숫자를 셌다. 언제 다시 뵐지 모른다. 아마 마지막이겠지.


본관에서 회랑을 지나면 암병원이다. 전창으로 경복궁이 보인다. 처음 본 듯 눈이 머문다. 사람들과 오래된 궁, 그 사이의 창. 생경하고 신비하다. 풍경 너머 슬픔이 일렁인다. 눈이 감긴다. 잘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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