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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효원 Nov 24. 2023

사랑의 멀리건

[깜언 베트남 16] 나이 마흔, 남자 셋, 여행(시즌 3)

“맥주 한 잔 할래요?”


전반 9홀을 마치고 다음 홀로 이동하는데 J 형님이 물었다. 이 형, 어쩜 이렇게 사람 마음을 잘 살필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게 바로 그겁니다!” 한 번 입술에 닿은 맥주는 떨어질 생각을 안 했고, 단번에 몸속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아, 시원하다!” 그늘에 앉았는데, 때마침 바람도 불어 흠뻑 젖은 등판을 시원하게 만졌다. 응원도 받고, 맥주도 마셨으니, 파이팅 해야지!


1번 홀, 가장 부푼 마음으로 섰지만, 단 한 번도 티샷을 제대로 친 적이 없어, 가장 나에게 실망한 홀이다. 그때마다 김차장은 말했다. “한 번 더 쳐봐!” J 형님이 거들었다. “멀리서 왔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래서 두 번, 세 번을 쳤는데도, 갈수록 힘이 들어가, 거리와 방향이 카오스 세계로 진입했다. 이번에는? 전반을 마치고 와서인지 맥주처럼 시원하게 날았다.


“야호!” 이게 뭐라고, 이렇게 좋을까. 깨백을 한 것도 아니고, 이번 홀 파를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드라이버 하나 잘 맞았을 뿐인데, 일행이 다 난리다. 나와 김사장의 샷이 좋을 때마다 김차장과 J 형님은 폭풍 칭찬을 해준다. 반대로 잘 맞지 않으면 못 본 척 쓱 지나간다. 그 순간 뭐가 잘 못 됐는지 가장 잘 아는 것도 자신이고, 가장 속상한 것도 자신이기 때문에….


섣부른 격려와 해결 방법 대신 그들이 주는 건 ‘사랑의 멀리건’이다. 보통 티샷이 망하면 주는데 줄 때는 트로트 리듬을 타고 줘야 한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김차장의 얼굴이 그렇게 구수할 수 없다. 다시 친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제대로 맞아 멀리건이 빛을 발할 때 이곳은 축제의 장이 된다. 물론 쓴맛도 배워야 하기에 멀리건은 조금만 받아야지.


‘괜찮아, 잘했어, 천천히, 한 번 더.’ 유년 시절, 누군가 나에게 이 말을 해주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대도 하지 않고, 부모님이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워낙 가난해, 실수가 손해를 부르니 내게 인생의 멀리건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 이해한다. 다만, 또 한 번의 기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힘찬 스윙을 하는 내가 궁금할 뿐.


마흔이 되어 시작한 골프, 우리를 필드로 이끈 아버지 김차장과 맥주를 입에 부어주는 어머니 J 형님은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러프와 벙커에서 삽질을 하고 있을 때도, 다그치지 않고 멀리서 가만히 바라본다. 덕분에 김사장과 안기자는 공이 페어웨이에서 나가도 정신은 나가지 않고, 기어이 좋은 샷을 만나 즐거운 마음으로 필드 위에 선다. 멀리건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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