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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Jun 06. 2020

살뜰한 하루에 일어난 일들

속상하지만 그럼에도 다행인 오늘

띠리리링. 6시 30분 모닝콜이 잠을 깨우면 여전히 10분 정도는 밤과 아침 사이에서 머물다 부스스 일어난다. 암막 블라인드를 걷으면 자연스레 들어오는 햇빛의 음영에 따라 하루의 날씨를 간음해 본다. ‘아, 오늘은 좀 흐리구나.’ ‘음, 오늘은 햇살이 좋은데?’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귀에 이어폰을 끼고 운동에 최적화된 음악을 들으며 약 5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스트레칭과 근력운동을 한다. 처음엔 도저히 못할 것 같았던 복근 운동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송골송골 가슴과 등에 땀이 맺히면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하듯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조금씩 단단해지는 근육의 질감을 살포시 느껴본다. 거울 앞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고 6개월 전이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에 나에게 한 움큼 칭찬을 던지기도 한다.  요즘 나의 아침 풍경이다.     


오늘은 6월 5일. 6월은 휴직의 마지막 달.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를 살뜰히 보내려고 노력한다. 범람하는 시간을 유영하는 유유자적한 날도 많았고 시간을 알차게 소비해야 한다는 내면의 꾸짖음을 기분 좋게 외면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6월은 ‘살뜰하게’라는 단어가 조금 더 어울렸음 했다. 나를 위한 순간과 시간을 차곡차곡 만들며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처럼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아직 없으므로. 오늘은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의 밤이 네 번 지나고 맞이한 날. 6월이 되고 처음으로 맛보는 금요일. 햇살 좋은 날. 어젯밤 엄마와의 긴 통화로 새벽 1시가 훌쩍 넘어 잠에 들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핑계 좋게 평소보다 침대에서 좀 더 머물렀으며 아침 운동은 밤에 할 것이라 나 자신과 약속하며 집을 나섰다. 오늘은, 일주일 전 갑상선 세침검사의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음, 우리가 우려했던 것처럼 결과가 좀 안 좋게 나왔는데요...”

“여기 오른쪽에 보면 혹이 있는데, 그 바로 옆에 또 작은 게 있잖아요. 이게 문제네요”     


내 갑상선 오른쪽에 작은 암이 발견되었다. 작은 크기다. 둥글둥글한 것이 어떻게 언제 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을까.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더라도 그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 아우라는 여전히 느낄 수 있다. 내 갑상선을 들여다본 의사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환자를 대하는 보통의 태도겠지만 나는 그의 태도에서 위로를 얻었고 그렇기에 궁금증과 걱정을 안전하게 풀어놓을 수 있었다.      


“저의 1차 추천은 수술을 하는 거예요. 크기가 작아 수술하기에 좀 애매할 수 있지만, 지금 떼어내서 과거력으로 만들면 어떨까 해요.”      


젊은 여성의 경우, 20-30% 정도는 크기가 커진다고 한다. 수술을 할 경우, 남아있는 갑상선 기능이 저하될 가능성이 반 정도. 그렇게 되면 평생 호르몬 약을 먹어야 한단다. 갑상선암은 완치율도 높고 나의 경우 그리 큰 크기도 아니기 때문에, 의사는 나를 안심시키며 천천히 질환과 수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곧 수술을 할 수도 있고 원치 않으면 6개월 뒤 초음파 검사를 다시 해보자고 했다. 그리곤 덧붙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은 것이라고.     

  

의사의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하려 꼭꼭 씹어서 들었다. 나의 지금에 대해 재차 물었고 확인했다. 수술상담예약을 잡기 위해 밖에 나와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차분히 예약을 잡고 수납을 마친 후 창경궁이 보이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먹먹하고 무서웠다. S의 전화를 받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데 참았던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사르코이드는 희귀 질환이다. 그래서 막막하고 아찔했다. 사르코이드 진단을 받고 6개월이 조금 안 되는 지금, 갑상선에 작은 암이 생겼다는 익숙한 질병의 낯선 사실이 내 몸에 머물고 있음을 알았다. 5월 초, 정밀 건강검진에서 갑상선 초음파를 했을 때 의사는 크기는 크지 않지만 갑상선 결절이 의심되니 조직검사를 권했다. 사르코이드와 대상포진, 그리고 주변에 알리지 않았지만 지난 6개월 동안 염려되는 몸의 다른 부분 검진을 받으러 다녔다. 잔병치례 하나 없었던 내가 살면서 이렇게 병원을 많이 다녔던 적이 있었던가.      


갑상선 세침검사 결과를 확인할 때까지 되도록 알리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니까.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자꾸 생채기가 나는 몸을 부러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난 이미 사르코이드와 함께 있는데, 이제 그만 하지'라는 마음도 들었다. 머리로는 지금의 몸을 긍정한다 생각하면서 나에게는 그 연습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병원에서 일을 마친 M을 카페에서 만나 이미 내 상황을 조금 알고 있는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문득 닭한마리 집에서 유육종증이 있음을 고백하던 추운 겨울 저녁이 생각났다. 그때처럼 사이다에 취해 울지는 않았지만 말과 말 사이 조그마한 공백들이 떠돌았다.    

  

M은 백수인 나(무급휴직인 까닭에 친구들이 나를 백수라 칭하며 맛난 것을 대접해 주곤 한다)를 데리고 저녁을 사주고 함께 낙산공원으로 올랐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유난히 밝은 달이 성곽 위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M에게 전생이 무엇이었을지 물었고, 그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우리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어 오늘 같은 날 함께 낙산공원을 걷고 있을까. 한바탕 깔깔거리며 웃다 대학로로 다시 내려와 헤어졌다. 살뜰하게 보낸 하루라고 생각했다. ‘살뜰하다’라는 뜻은 ‘일을 정성스럽고 규모 있게 하여 빈구석이 없다’인데, 일은 아니지만 하루를 정성스럽게 보낸 것 같아 그냥 이 단어에 오늘을 맡겨 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홀로인 채로 생각하는 시간이 찾아오자 엄마에게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할까 염려되어 조금 먹먹해졌다. 그러다 T의 전화를 받고 뭉클해졌으며 덩달아 JJ의 마음이 전해져 든든했다. K가 전해준 웃긴 동영상을 M에게 보내며 그래도 이렇게 위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니 무척 다행이라 생각했다.


살뜰한 오늘 하루.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일어난 하루. 산책하기 좋은 바람에 콧노래를 부르며 휘영청 밝은 달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한 하루. 먹먹함을 따스함과 유쾌함으로 채워준 사람들이 있음에 좋은 하루. 속상하지만 그럼에도 일찍 알아서 다행인 그런, 하루.     



어떤 음악을 소개할까 고민했는데 쉬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음, 어떤 음악을 함께 들으면 좋을지 혹시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기다림만으로도 설레기 시작하네요 :)


* M이 찍어준 사진을 제목 배경으로 사용하였어요.

* 세침검사는 아주 얇은 바늘로 갑상선 혹의 세포를 추출하는 검사입니다. 저는 조직검사 전 단계로 이해했고, 마취는 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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