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늬바람 Feb 26. 2020

시간을, 위로받고 싶었을지도

걱정이 있걸랑 모모에게 가 보렴. 다 해결될 거야!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부지런히 길을 쓰는 청소부 베포가 모모에게 말했다. 한꺼번에 전체를 생각하지 말고,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한다고. 그렇게 되면 일을 하는 게 즐겁고 잘해 낼 수 있다고.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      


-

유육종증 확진을 받기 전 마지막 검사로 기관지 내시경과 복부 CT 촬영을 할 때였다. 2박 3일 입원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퇴원과 동시에 체력이 뚝 떨어졌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그제야 기관지 내시경이 위내시경보다 힘들다는 의사와 간호사의 조언을 직감하며, 사무실에 양해를 구했다. 그 주에 예정되어 있었던 회의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을 보내고 주말 행사 역시 가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상한 감정이 마음을 쓸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꼭 나만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진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리고 한 동안 이런 일들이 지속될 것이라는 씁쓸함.      


보통 시간이 생기면(물론 시간을 늘 있지만 바쁘거나 일을 할 때면 없다고 생각하므로) 기쁘기 마련인데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생긴 시간이라 조금 막막하게 다가왔다. 병원에 가져갔다 첫머리만 시작한 미하엘 엔데 소설 ‘모모’를 다시 폈다. 갑자기 생긴 시간에 대해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모라면 나의 막막함을 아무 말 없이 한껏 위로해줄 것만 같았다.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      


이 구절이 마음을 잡았던 건, 그 당시 나는 자꾸만 도로 전체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도로 전체라기보다는 비질을 모두 끝낸 도로 끝을 그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딛게 될 걸음을 봐야 한다고 했다. 도로 끝이 아닌, 바로 다음에 딛게 될 걸음.     


조직 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접한 날, 몇 달 전 예약해 두었던 휴가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친구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계획을 취소했고, 에어비엔비 사이트를 탈탈 털어 찾은 숙소를 모두 취소했으며,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던 비행기 표를 취소했다. 남아있던 모든 휴가를 병가처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 그건 1년의 마지막을 잘 정리하는 나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상황에서 당분간 쉬는 게 좋겠다 싶었다. 몸 이곳저곳에 염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 정도의 심각성을 떠나 올해와 같이 일을 하며 내년을 살 자신이 없어졌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그때는 정말 나를 원망할 것만 같았다. 그럼 쉬면 얼마나 쉬어야 하지, 몇 개월이면 되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쉬어야 하는 거지.   

   

‘쉬다’의 사전적 정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편안한 상태가 되게 하다’이다. 짧게 쉬는 건 자신이 있는데, 긴 시간 동안 쉬는 건 자신이 없었다. 사실, 그렇게 쉬어본 적도 없다. 주변 친구들과 동료들은 하나같이 쉬라고, 이때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쉬지 않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들이라 쉬라고 말하는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떻게 쉬는 게 잘 쉬는 걸까. 쉬는 것도 '잘'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조금 웃겼다.        


잘 쉬고 싶다는 생각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가 원해서 갖는 쉼도 아니니 뭔가 잘 모르겠지만 그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이렇게 쉬고 싶지는 않았는데, 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 마음껏 하는 시간으로 사용하고 싶었는데. 아직 제대로 쉬지도 않았는데 뭔가 이미 망한 느낌이 들었다. 꼭 후회할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 아직 한 발짝도 내밀어 보지 않았고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난 이미 저만치서 걱정만 하고 있었다.           

 

느리게 갈수록 더 빠른 거야      


호라 박사의 집으로 가면서 빨리 가려는 모모에게 카시오페이아 거북이 느리게 가라고 외쳤다. 카시오페이아와 모모는 전보다 더 느리게 걸었고 그럴수록 더욱 빨리 갈 수 있었다.      


사실 쉰다고 해도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것도 아닌데, 일이 중심이 된 내 삶에서 쉰다는 건 또 다른 일을 위한 ‘충전’으로 이해될 뿐이었다. 잘 쉬어야 또 일을 이어나갈 수 있으니까. 또, 일이 없는 시간은 공백과 같다고 생각했다. ‘쉰다’라는 개념이 ‘멈춘다’라는 의미로 다가왔던 것 같다. 비어있는 시간, 꼭 채워 넣어야 할 것만 같은.     

  

나만의 속도, 저마다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살아간다고 되새겼는데. 막상 이런 일이 닥치니 되새긴 시간이 무색하게 영 먹히질 않는다. '느림의 미학 역시 개뿔. 느려도 괜찮은 사람이나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느려지면 결국 고생해서 따라잡아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야, 저마다의 속도가 있는 거야.' 다양한 생각들이 마음에서 엉커버렸다.     

     

‘느려도 괜찮아’를 넘어 ‘느리게 갈수록 더 빠른 것’이라고 거북이 외쳤다. 빠른 것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느림이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그게 더 빠른 거라며 소리쳐주는 거북이 어찌나 든든하고 의지하고 싶던지. 느린 템포로 걸을 때면 그제야 보이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될까 싶어도 바로 앞에 내딛는 그 걸음에만 집중해서 간다면, 괜찮지 않을까.  


-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쉰다고 해서 시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당연스레 하던 출퇴근이 사라지니, 새롭게 일상을 구성해야 했다. 더욱이 아침 8시 전에 약을 먹어야 해서 일찍 일어나다 보니 예전보다 오전 시간이 늘어났다. 꼭 여행지를 온 느낌. 시간이 평소보다 많아진 것 같아 하루가 길게 느껴지는데 돌이켜 보면 굉장히 짧은 하루인 것 같은.      


모모를 읽은 지 3개월 정도가 지났다. 바로 그 다음 걸음에 집중하라는 말을 매일 기억하는데도 가끔은 도로 끝을 그려본다. 느리게 가는 게 더 빨리 가는 거라는 거북의 위로에도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자꾸만 물어본다. 그래도 어떨 때는 생각보다 즐기고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다. 나 이렇게 빈둥거리는 게 잘 맞는 사람이었나.     

 

스킨답서스와 고무나무(아픈 것 같아 분갈이와 가지치기를 했다). 드디어 초록이들에게 영양제를 하나씩 꽂아 주었다! 사진에 없지만 야자나무에게도 :)  


순간이 채워져 시간이 되고, 시간이 쌓여 삶이 된다. 불현듯 찾아온 유육종증 덕분에 만들어진 이 순간과 시간도 켜켜이 쌓여 나의 일부가 되고 내 삶이 될 텐데. 아침에 일어나 약을 먹고 라디오를 틀어 익숙한 디제이 음성과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얼마 전 분갈이를 해준 고무나무와 스킨답서스의 안녕을 묻고, 날씨를 확인하는 이 찰나들이 어떻게 나를 구성하게 될지. 그저 다음 걸음에 집중하는 수밖에.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FKJ (French Kiwi Juice) "ylang ylang"

: 이 음악 처음 들었을 때를 잊을 수 없네요. 제가 정말 애정하는 뮤지션이랍니다. 

뮤직비디오가 정말 아름다운데요. 남아시아에 있는 어느 정글(섬이라고 얼핏 봤던 것 같은데..)인 일랑일랑(ylang ylang)이란 곳이에요. 가고 싶어요, 저곳에. 
이전 02화 동네 사람들,  나 유육종증이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