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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Jul 05. 2020

최선의 선택이라는 두려움

상실이 실패가 아니기 위한 최선의 선택, 그리고 두려움

“갑상선 CT 상으로 봤을 때 림프절이 커져 있어요. 초음파 상으로도 확인됐고요. 갑상선 유두암의 특징 중 하나가 림프절 전이입니다. 사르코이드 때문에 림프절 염증이 커져 있는 것일 수도 있는데 전이 여부를 위해 한번 더 조직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조직 검사라면 세침 검사 말씀하시는 거죠?”

“네네.”

“그거 별로 유쾌하지 않던데요.”

“아, 그렇죠. 많이 아프긴 합니다.”

“그럼 조직 검사까지 해서 림프절 전이 여부를 확인한 다음 수술 방법과 일정을 다시 잡는 게 맞겠네요.”

“네네, 그게 더 좋지요.”


와, 뒤통수를 한방 맞는 느낌이었다. 나는 갑상선 위치의 목 부분을 어루만지며 나왔다. 완전절개라니. 림프절 전이가 확인되면 수술방법이 부분절개에서 완전절개로, 완전히 달라지는 거였다. 나의 오늘 예상 시나리오에는 림프절 전이 따위 들어있지 않았다. 그건 아닌데. 그럴 수는 없는 건데.     


나의 예상은 이랬다. 지난주에 검사한 초음파, CT, 피검사 결과를 듣고 위치가 나쁘지 않고 전이 위험이 없는 것 같으면 수술 일정을 미루고 3개월이나 6개월 뒤 초음파 검사를 다시 하려 했다. 만약 전이가 의심되거나 위치가 좋지 않다면 빠른 일정을 잡아 수술할 예정이었다.    

 

처음 내과에서 갑상선 유두암 진단을 받고 외과로 수술 상담 예약을 잡았다. 약 열흘 뒤에 있을 상담예약을 기다리면서 어차피 해야 할 수술이라면 그냥 빨리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의사를 만나면 수술을 한다고 해야지.’ 하지만 막상 외과 의사를 만나 상담을 받으면서 수술에 대한 불안감이 휘몰아쳤다. ‘과연 지금 수술하는 게 가장 적절한 선택인 걸까. 조기에 발견되었으니 조금 더 기다렸다 판단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 적절한 시간을 놓치면 어떡하지, 더 상태가 나빠지면? 수술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 수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수술 가예약을 잡았다. 혹시나 해서였다. 그리고 수술을 어떤 방법으로 할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초음파와 CT 촬영, 피검사를 진행했다.     


검사를 앞두고 보고 싶었던 지인을 만났다. 그는 십 년 전 갑상선 완전절개를 한 경험이 있고 지금까지 약을 복용하고 있다. 암의 위치가 전이 가능성이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바로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역시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아 그 마음을 말하러 갔다가 담당 의사의 소견을 듣고 곧 일정을 잡았다. 진동하는 추처럼 멈추지 않고 갈팡질팡하는 나에게 그는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두고, 번번이 내 예상을 빗나가는 내 몸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란 없었다. 최선의 선택만이 남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와 내 몸은 맞이하는 거였다. 

    

최선의 선택이란 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수술을 위해 잡아둔 모든 검사를 다 받아보기로 했다. 암의 위치와 전이 여부, 몸 상태 등을 파악한 후 그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최선의 선택은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해보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릴 예정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기에 나의 선택은 최소의 동시에 최대의 것이었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때, 몸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몸’이 아닌 ‘몸이 통제하는 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처음 갑상선 유두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죄책감 따위 들지 않았다. 왜냐면 암세포는 그냥 생긴 거니까. 세포 변이를 하다가 그렇게 된 거여서 괜찮았다. 가족력?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이 된 세포의 존재를 알고 난 다음 취할 수 있는 행동에는 나의 책임이 따른다.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 주사위를 던지고, 그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싫었다. 조기발견에 감사하며 빠른 날 수술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 이후의 삶이 두려웠다. 사람마다 판단하는 ‘삶의 질’이 달랐다. 무엇이 나를 위한 길인지 알 듯 말 듯한 것이 꼭 안개 낀 터널 속에서 앞과 뒤를 모른 채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다음 주에 조직검사를 받고 그다음 주에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다. 몸 상태와 이를 확인하는 병원 일정에 있어서 나의 선택은 매우 제한적이다. 삶이란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 말하지만 몸이야 말로 예측 가능성의 상실이다.     


상실은 실패이자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다. 갑상선을 잃는다는 것 역시 ‘정상’이 아닌 상태로 되는 것만 같아 싫었다. 무례한 고백이다. 하지만 몸이 더 이상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니 질문하게 된다. 몸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만 하는 상태에 대한 긍정성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일까. 나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온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여전히 부어있는 림프절과 갑상선 수술 일정이 내 의지대로 될 수 없음을 알아차렸을 때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 역시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과연 나와 내 몸에게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낫고 싶은 열망과 몸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과 그럴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과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내면의 목소리와, 몸과 끊임없이 협상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타인들의 경험을 읽고 또 읽으며 자꾸 묻는다. 아니, 이제 그만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 불쑥 떠오르는 순간까지 막을 수는 없다.     


‘내 뜻대로 몸을 사용하기’에서 ‘몸의 뜻대로 살아가기’ 혹은 ‘몸과 협상하며 살아가기’를 배우는 것으로의 방향 이동 말이다.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194쪽)     


길치에 방향치인 내가 이번엔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을까.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Tom Misch "Day 5: For Ca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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