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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Aug 04. 2020

그럼에도 나였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나에게

그는 가만히 빗소리를 들려주었다. 타닥타닥 무언가에 부딪혀 나는 빗소리. 피할 겨를 없이 대차게 내려 멈칫하다가도 이내 마음 저 구석까지 시원하게 씻어주는 빗소리. 어딘가 꼭 위험할 것만 같은, 막힌 하수구 위로 물이 역류할 정도로 무참히 내리는 빗소리. 잠깐 동안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사방이 흰색 벽으로 둘러싸인 답답한 강의실을 벗어났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머물고 유랑하다 녹음기 소리를 끄는 순간 우리는 모두 다시 강의실로 돌아왔다. 안전하게.      


소설을 쓴다는 그는 요즘 빗소리를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소설 속 묘사를 위해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아닌 청각의 표현을 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비가 내리는 순간 어떤 물성과 만나면서 제각각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포착했다. 비가 내리는 장소와 시간, 부딪히는 곳의 물성이 다르고 비의 세기, 속도가 또 다르듯이 빗소리 역시 그러했다. 그러면서 발견할 수 있는 ‘개별의 고유성’이 오롯이 빛날 수 있는 존재의 특별함을 이야기했다. 아니 그가 말했는지 내가 느꼈는지 잘 모르겠다. 그날 나의 노트는 ‘개별의 경험이 오롯이 빛을 발할 때’에서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집중해서 듣고 있는 우리들로 시선이 옮겨갔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가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할 때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하는 일을 멈추고 화자에게 집중하고 공감할 때, 슬며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순간을 서로가 발견하고 반길 때, 우리는 또 다른 관계의 세계로 진입한다고. 투명하고 묵직한 막이 한 꺼풀 벗겨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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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한 달 꼬박, 마음에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다. 유육종증 진단을 받은 뒤 6개월 동안 해왔던 모든 습관들이 망가져버린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쉴 때면 책을 잡던 습관도 이어가기 어려웠다. 침대에서 알람을 듣고 눈을 떠도 ‘꼭 일어나야 하나’라는 생전 가져보지도 못한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해 몇 시간을 누워 있기도 했다. 식욕은 감퇴하고 먹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체중이 감소했고 스트레스가 상승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목으로 쉽게 넘길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먹었다. 배고픔을 느껴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고 꼭 체한 것 같아 곧 멈췄다. 억지로 먹으려 하면 토할 것만 같았다. 대책 없이 빠지기 시작하는 머리카락을 주어 담으며, 예전처럼 돌아가는 손톱을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최소한의 습관이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하게 될 수술을 대비해 회복력을 높여야 했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고민 끝에 피트니스 클럽에 등록해 개별 PT를 신청했다. 평소 꾸준히 해 왔던 하체 운동을 하고 자전거를 타다가 쉽게 말해 무릎이 나갔다. 소염제를 먹고 하체 운동을 멈추고 근육을 풀어주고 마사지를 해주어도 무릎은 여전히 아팠다. 예전이라면 크게 무리가지 않은 정로도 운동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체력을 되찾고 습관을 갖추고 일의 생산성을 높이고자 하는 의지가 높을수록 몸은 다르게 반응했고 나를 통제했다. 생각과 마음이 강할수록 몸의 반작용 역시 강하게 드러났다. 무서운 속도로 퍼지는 두드러기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으로.      


나는 현재 탈스테로이드 증상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리바운드 현상이라고도 한단다. 약물을 갑자기 중단했을 때 예전보다 더 심각한 증상이 나타나는 현상. 나의 경우 단번에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서히 멈춘 것도 아니었나 보다. 네 알 먹던 것을 두 알로 줄여 일주일, 그다음은 한 알씩 일주일을 복용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스테로이드 복용을 완전히 끊었을 때 그동안 숨어있던 바이러스들이 한순간 들고일어났다. 병원에 찾아가 항히스타민제를 처방받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아 결국 스테로이드를 다시 복용했다. 사실 마음 한구석에는 차라리 스테로이드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몸이 더 좋았으니까 그리고 ‘탈’하는 과정이 견디기 어려웠으니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몸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다. 탈스테로이드, 리바운드 현상 등 나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며 원인을 찾으려 애를 썼다.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이 말도 없고 예민한 몸뚱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면 내 마음이 한결 나아질지도 모르잖나. 인터넷에는 증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많았고 그 덕분에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증상을 겪고 있는 몸과 마음을 위해 무엇을 하라는 말은 없었다. 우울감과 무기력이 대표적인 증상인데, 그럼 그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하라는 걸까. 염증을 가라앉게 도와주는 스테로이드가 부족한 내 몸이 무릎 염증도 힘겨워하는데 그럼 이건 어떡하나. 왜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 거야.    

  

자주 가던 동네병원을 찾았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증상을 하나씩 담담하게 설명하다 결국 울컥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 혹은 둘러대며 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의사는 지금을 견디기 어려우면 스테로이드를 조금 복용하는 것도 방법이라 했다. 하지만 갑상선 수술을 위해서는 약을 그전에 끊어야 하고 수술을 하게 되면 이런 증상이 한차례 더 올 거라고 답했다. 잠시 흐릿하고 암담했다.      


질병을 경험하면서 나는 줄곧 이 몸의 변화에 매몰되지 말자고, 나를 돌보는 사람들과 관계를 늘 기억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스테로이드가 없는 내 몸과 마음의 변화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처음 마주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에게 집중하지 않고 거리두기를 하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답을 줄 수 없는 몸에게 자꾸만 자꾸만 말을 걸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고. 쪼그라져가는 몸과 마음에 쉴 틈도 주지 않고 드러나는 증상 하나하나에 반응을 하며 나를 몰아세웠다. 어쩔 때는 그냥 지쳐 무심해질 때도 있었다. 머리카락이 빠지면 빠지는 대로 배고프지 않으면 굶고 알러지 반응이 심하게 오더라도 내버려 두거나 외면했다. 우울하거나 무기력해지면 그냥 그러했다. 내가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놓아버리기도 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현실의 다양한 사건과 사고를 마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내 몸 하나 어쩌지 못하고 절절매는 못난 사람이 된 것 같아 괴로웠다. 몸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자꾸만 잊었다. 아니 잊고 싶었다.      


그 순간순간은 지난하고 길었지만 지금 돌이켜 7월을 생각하면 너무 짧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허무한 시간을 그렇게 애를 쓰며 보내왔다. 처음이니까 괜찮다고 관대하게 몸을 대할 수도 있었는데 처음이니까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면 잘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나의 ‘한 달 적응기’를 기억해 냈다. ‘한 달 적응기’란 내가 새로운 곳에 정착했을 때 흔들리고 힘들어도 한 달 동안은 괜찮다고, 나 자신을 내버려 두는 시간을 선물하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여행이나 다른 목적으로 한국이 아닌 곳에서 장기 체류를 하면서 힘든 시간을 슬기롭게 보내는 나의 의식. 까맣게 잊고 있다 문득 머리를 스쳤다. 제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수업을 빼먹어도, 연락이 좀 늦어도, 나만의 버블에 들어가도, 술을 많이 마셔도 괜찮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나는 새로운 곳에 이제 막 도착했고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이에 좌충우돌하는 시간은 무조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한 달이 지나면 다시 나의 일상에 돌아가야 한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한 달 적응기. 여행은 아니지만 나만의 의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원한 적 없지만 꽤 길고 긴 여정의 시작에 서버린 나에게, 나는 적응기를 선물해야만 했다. 다만, 나는 이 여정을 시작한 지 몰랐고 그래서 혼란스러웠으며 결국 적응기조차 줄 수 없었다. 이제 알았으니 적응기의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해 보겠다. 내가 안전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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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문득 빗소리를 녹음했던 그를 떠올리며 서둘러 핸드폰을 창가에 들이밀고 녹음을 시작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였다. 너무나 무겁고 강하게 내려 어딘가 쓸려가는 존재가 있지 않을까 잠시 염려되는, 그런 비였다. 녹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었다. 내가 있는 방 창가 가까이에서 비가 투둑 하고 떨어지는 빗소리, 땅바닥에 내리꽂아 버리는 강렬한 빗소리, 나무와 나뭇가지, 잎 사이사이를 뚫고 흙에 떨어져 밑으로 스미는 빗소리, 누군가의 우산을 맞고 튕겨져 나가 다시 땅으로 꽂히는 빗소리. 목소리와 빗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면서도 제각각의 소리가 고유하게 들렸다.      


그럼에도 비였다. 다양한 빗소리를 내었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의 비였다. 마치 성격도, 속도도, 마음도 제멋대로인 한 사람이 낯선 물성을 만나 바로 반응하고 적응해 고유한 존재에 색을 더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럼에도 나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던 나도, 모든 것을 관조해 보겠다며 마음을 쓰던 나도, 화가 나 모든 걸 내버려 두고 싶어 놓아 버렸던 나도, 모두 나였다.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 어쩌면 공감받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세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타인에게 내밀 것이 없어 보이는 세계, 꽤 사적이고 자랑할 수도 없어 가끔 초라해져 보이는 세계, 그럼에도 사적일 수만은 없다고 다짐해 보이는 세계. 그곳으로 나답게, 지혜롭게 가고 싶어 버둥거리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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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j , "Mo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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