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 이리저리 굽어 꺾임
창경궁 안을 거닐다 대온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단에 잠시 앉았다. 사방으로 뻗은 굵은 가지와 무성한 잎이 만들어 낸 그늘 덕분에 뜨거운 햇볕을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마주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자연이 만들어낸 저마다의 모습과 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짙은 녹색은 짙다 못해 검게 보였고 푸른 하늘은 푸르름의 스펙트럼이 어디까지일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다채로웠다. 하늘과 함께 있는 구름 역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미세한 물방울이나 얼음 알갱이가 모여 있는 형체라고 건조하게 말하기엔 거대하고 웅장하기도 하며 경이로운 풍경에 늘 등장하는 구름이 아니던가. 창경궁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청명함 그 자체였고 해를 정면으로 가리고 있는 구름 덩이의 실루엣은 아름다웠다.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요일 오전이었지만 나처럼 창경궁을 찾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들이 보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온 아이도 보였다. 그들은 삼각대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장 적당한 지점에서 함께 단정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슬며시 내 옆을 바라보니 계단 양 끝에 위치해 있는 두 나무가 보였다. 아, 이 나무들 덕분에 그늘에서 쉬고 있는 건데. 나무의 존재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싶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나무가 살아온 시간은 얼마 큼일지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아마도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계단의 가로길이는 대략 2-3미터쯤 돼 보였고 양 끝에 나무가 서 있었지만 사방으로 우렁차게 뻗은 가지들 덕분에 두 나무는 만나고 있었다. 가지들이 만나는 지점 아래에서 나는 쉴 수 있었다. 나무의 매력적인 모습에 감탄을 하며 본격적으로 감상하기 시작했다, 넓게 뻗은 나뭇가지부터.
처음엔 그저 우렁차고 당당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으로 뻗어가는 나뭇가지들이 굵고 단단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나무줄기와 가지를 쳐다보다, 줄기에서 가지로 나눠지는 그 경계의 굴곡이 보였다. 곧게 뻗었다고 하기는 굴곡이 꽤 많은 나무였다. 하나의 몸통에서 큰 줄기가 두 개로 나뉘어 또 다른 줄기가 된 듯이 각자의 가지들을 펼쳐내었다. 나뭇가지의 굵기 역시 제각각의 모습으로 뻗어갔다. 곡선을 그리며 자랐다고 하기는 투박하고 거칠게 느껴졌고 어쩌다 저렇게 자랐을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물론 나무의 종류와 특성을 잘 모르기에 생기는 오해일 수도 있지만 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방식과 만들어내는 굴곡에 잠시 마음이 머물게 되었다.
올해 3월, 병원을 옮기고 처음 암병원을 찾았을 때도 창경궁으로 향했다. 원래 검진을 받던 병원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게 되어 잠시 폐쇄되는 바람에 병원을 옮기게 되었다. 복용하고 있던 스테로이드가 거의 바닥나기도 했고 M의 권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창경궁에서 마음에 들어왔던 나무는 주변보다 훨씬 더 높고 크게 자라 풍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늘 저렇게 건강하게 자라진 않았을 텐데 오랫동안 그 자리를 견고하게 지켜왔을 그 시간이 대단하게 느껴졌고 내심 부러웠다. 그 나무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나무의 사진을 찍었고 친구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높고 큰 나무를 떠올리며 내 옆의 나무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무의 줄기 길이만큼 나뭇가지가 뻗어있어 키가 더 크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아무렇게나 뻗어나간 가지들을 줄기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을까 잠시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보지 못하는 땅 속으로 뻗어 있는 뿌리를 그려 보았다. 모르긴 잘 몰라도 이 나무의 뿌리는 나뭇가지가 성장한 길이만큼 혹은 그보다 더 땅속으로 뻗어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다시 관찰하기 시작했다. 투박한 굴곡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무엇을 견디며 무엇을 양분으로 삼아 어떻게 방향을 정해 나아갔을까. 서로의 몸에서 나고 자라 서로의 몸을 둘러싸며 어떻게 잎을 피워내고 잔가지들을 또 생성했을까. 내가 살아온 몇 배의 시간 동안 햇볕과 바람, 비, 눈 등을 온몸으로 맞으며 지금의 굴곡을 형성했을 거라 짐작하니 나무가 새롭게 보였다. 상황에 맞선 다기보다는 그 상황에 적응하며 자신의 형체를 만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한눈에 보기엔 꽤 우렁차 보였고 사방으로 뻗은 가지와 잎이 누군가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었다. 양 끝에 자리 잡은 나무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 그늘이 아니었다면 잠시 앉을 수도 없었을 테고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도 없었을 테니까.
나무의 굴곡이 어쩌고 저쩌고, 줄기의 길이가 어떻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나만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무는 그저 나무의 바람대로 시간을 보내고 자랐을 테니까(혹은 자라고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나무의 ‘굴곡’이 새롭게 다가왔다는 것은 기억하고 싶었다. 주변보다 높고 곧게 자란 나무가 아니라 옆에서 그늘을 만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란 나무가 마음에 들어왔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나무의 굴곡이 무언가를 견디면서 생성된 특정한 모양인 것처럼 느껴졌고 내 몸에도 굴곡이 있다면 어떻게 지금을 견디고 만들어지고 있을지 알고 싶어 졌다. 나무를 바라보는 감각이 하나 더 더해진 것 같았고, 내 몸을 바라보는 따듯함이 한 뼘 더 자란 것 같았다.
담당의사는 3월에 찍은 폐 엑스레이와 이번에 찍은 것을 비교해 보여주었다. 엑스레이 상에서 폐를 흐르는 혈관에 붙어있는 염증의 크기는 그리 줄어들지 않았다. 미세하게 옅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예전에 찍은 CT 상에서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다른 부분은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그 결과를 기반으로 판단하자고 했다. 약을 더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CT 촬영이 필요한 건 아닌지 묻는 나에게 의사는 조금 망설이다 답을 했다. 젊기 때문에 웬만해선 CT 촬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만약 엑스레이 상으로 염증이 더 커져 보이거나 의심이 되면 그때 촬영하자고 했다. 스테로이드를 중단하고 나서 이런저런 몸의 이상을 설명했을 때 의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 하는 것 같았는데, 한참 뒤에야 몸이 적응을 하려면 시간일 걸린다고 말했다. 되도록이면 약은 먹지 않은 것이 좋다고. 6개월 뒤에 다시 봅시다, 란 짧은 말로 검진이 끝났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내 몸은 유육종증이란 희귀 질환을 앓고, 간직하고, 견디고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쉽게 줄어들지 않는 염증을 보면서 조금 아프게 확인했다. 검진을 마치고 M에게 연락했고 마침 시간이 되어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점심 약속 시간까지 대략 한 시간 정도 남았고 나는 창경궁으로 향했다. 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코로나 19로 휴궁이 되기도 했었고 그동안 병원에 오더라도 갑상선센터로 향했기 때문에 쉽게 창경궁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갑상선센터에서 창경궁으로 가려면 기나긴 통로와 복도를 가로질러 암병원을 거쳐 나가야 하는데, 실제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멀어 쉽지 않았을지도.
병원을 나오면서 폐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속삭였다. 그동안 몸의 다른 부위에 나타난 통증 때문에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흠, 생각해 보니 창경궁 산책이 폐에겐 조금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참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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