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래서외롭다고 했구나.
“젊은 사람도 이거(엑스레이) 찍으러 오나 봐”
“응, 그러네.”
할아버지는 환복 후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벤치로 향하는 나를 흘깃 보시더니 이내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속삭였다. 두 분은 동시에 나에게 시선을 짧게 두더니 곧 당신들만이 들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갑상선센터나 유방암센터에서 초음파를 찍기 위해 기다리다 보면 다정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할머니의 가방과 물건을 가지런히 들고 기다리는 할아버지를 볼 때면 신기하기도 했고 조금 귀엽기도 했다. 그날도 그랬다. 두 분은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렸고 서로의 몸이 친근하게 기대어 있었다.
평소 나이 듦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병원에서는 달랐다. 나는 어딜 가든 ‘젊은’ 환자였다. 의사들은 내가 젊기 때문에 스테로이드를 처방하는 것에 보수적이었고 혹시나 생길 부작용을 미리 걱정했으며 또한 아직 젊기 때문에 갑상선 수술을 추천했다. 아, 내가 젊은 나이구나 싶으면서도 서른 중반의 내가 병원에서 아직 젊은 축에 속한다는 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나이를 괘념치 않는다 생각했지만 사회가 긍정하는 젊음이 사실은 좋았던 거다.
나에게 ‘젊음’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 ‘여성’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임신 가능성’을 가진 몸이다. 엑스레이나 CT 촬영은 미세한 방사선에 노출되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는 혹시 모를 임신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어떤 날에는 “임신 가능성이 있으신가요? 임신 계획이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을 두세 차례 이상 받기도 했다. 임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누군가라면 꼭 알려야 할 필수 정보이겠지만, 임신을 염두하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반복적으로 동일한 답을 해야 하는 과정이 슬슬 지치기도 했다. 어떨 때는 대문짝만 하게 ‘임신 가능성 없음!!’을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갑상선 수술 상담을 받을 때도 의사가 수술을 권한 이유 중 하나는 나중에 임신했을 때 호르몬의 이유로 갑상선 암세포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불안해하기보다 제거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 좋다는 거였다. ‘아, 저는 아직 임신 생각이 없습니다만?’이라고 대답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올라와도 미래는 모를 일이다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가 무어라고 정말.
건강이 정체성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나는 젊고 아픈 사람이 되었다. 예상하지 않은 전개였다. 질병이나 아픔은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그때 찾아오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픔을 예상할 수 있는 연령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국가에서 제공하는 건강검진에서도 30대 중반 여성에게 ‘자궁경부암’ 정도가 무료 검사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허리나 무릎 통증, 어깨 결림 등은 오래 앉아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있을 법한 통증이기 때문에 아픔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질병은 어느 날 불쑥 반길 수 없는 손님처럼 찾아왔다.
일을 쉬는 동안 가장 빈번하게 다녔던 곳이 병원이다. 동네병원만 다니다 대학병원을 다녀 보니 잘 몰랐던 새로운 세계로 입문하는 것 같았다. 일단 규모 자체가 굉장하고 진료와 예약, 처방 등이 잘 짜여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규칙적으로 잘 돌아가는 복잡한 세계의 수많은 구성원 중 하나가 되는 것 같은 상상. 그러다 보니 병원을 관찰하게 되고 병원에 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게 되고 병원을 다니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젊고 아픈 사람은 외롭다 했던가. 선뜻 와 닿지 않았다. 나에겐 곁을 내어주고 시간과 마음을 베푸는 친구들이 있으니 꼭 외롭지만은 않겠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상선 수술을 위한 임파선 조직검사를 하며 병원을 나오며 순간 외로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오후 12시 반이 좀 넘은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병원을 나와 길을 내려가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세침검사를 또 했다고, 그리고 검사비가 지난번보다 약 3배 가까이 많이 나왔다고. 속상함과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다시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해서 좋을 얘기도 아니고 다들 바쁠 테니까.
병원에 몇 시간 있으면서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들만이 가득한 풍경에 적응해 있다가 밖에 나오면 그제야 세상의 사람들이 보인다. 마침 점심을 먹고 학교로, 사무실로 돌아가는 젊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카페에서 막 주문한 차가운 커피 음료를 하나씩 들고 친구 또는 동료들과 보이는 사람들과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대화를 재잘대며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느끼면서, 사회의 질서에서 잠깐 빗겨 나 있는 내가 보였다. 뭔가 착잡한 감정이 가슴에 투둑 하고 떨어졌다. 나는 세침(조직)검사 한 부분에 작은 밴드를 붙인 채로 두드러기가 장악한 몸을 이끌고 또 다른 병원으로 이동 중이었다. 장기간 복용하던 스테로이드를 줄이고 완전히 중단하면서 몸이 그 변화를 감당하지 못해 무서운 속도로 바이러스들이 일어났다.
지난해 병원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회사로 출근하거나 카페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 동안 나는 병원에 가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병원에 가는 것뿐이지만 착장에 신경을 썼다. 어차피 검진을 위해 곧 환복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정도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외출하기 때문이었고 생각의 다른 면을 들춰보자면 질병과 함께 살지만 ‘아픈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체중이 늘고 쉬면서 더 ‘건강하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럴 때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질병으로 인한 나의 두려움과 불안, 고민이 무색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멈출 듯 멈추지 않는 검사가 계속 이어지면서 지인들에게 병원 일정이나 질병에 대한 말을 아끼게 되었다. 나조차 지루해져 버린 이야기. 나조차 피로해지는 이야기를 누가 듣고 싶어 할까. 공감하기 어렵고 위로의 말조차 선뜻 못 해 주저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수차례 곱씹은 뒤에야 툭하고 마음에 있는 말을 던질 수 있었다. 아, 이래서 젊고 아픈 사람은 외롭다고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