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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Feb 10. 2020

동네 사람들,  나 유육종증이래요!

병은 소문내야 빨리 낫는대요

살면서 그렇게 많은 백열등을 본 것은 병원 건물이 처음일 거다. 하얀 벽으로 둘러싼 건물에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과 하얀 전등이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병원. 티끌 하나 묻으면 즉시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날 것 같은 그런 곳. 처음엔 병원의 공기도 낯설었는데, 이제는 입구에 들어서면 특유의 모습과 냄새에 몸이 익숙해진다. 예약한 시간에 진료를 보지 못하는 것 역시 다반사. 지연된 시간을 잘 견딜 수 있는 저마다의 지혜가 필요하다. 


조직 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식은 나를 컴컴한 구렁텅이로 턱 밀어 넣는 것 같았다. 조직 검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추가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게 겁이 났다. 내 몸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알고 싶다가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나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아서 더 불안했다.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린 나를 가만히 안아주던 동생이 없었더라면, 아무 말 없이 황급히 사무실을 나와 버린 내가 걱정되어 몰래 집까지 찾아와 주었던 J와 A가 없었더라면, 더 겁이 났을지도.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내 질병이 유육종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기관지 내시경과 복부 CT 촬영 등을 추가 검사하기로 결정했고 더 이상 다른 동료들에게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추가 검사 일정이 점점 생기면서 예정되었던 행사와 회의, 업무 등에서 빠져야 했다.       


아프다는 현실을 반쯤 정도밖에 자각하지 못했던 내 인생 첫 입원. 조금 긴장되고 설렜다. 평소 읽고 싶었지만 미루어두었던 책을 네 권 챙겼고, 컴퓨터에 영화를 두 편 담았다. 아, 가습기도 챙겨가야 하는데 오버인가. 샤워는 할 수 있겠지(입원하는 동안 깨달았다. 병원에서 남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샤워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추울 수 있으니 무릎담요도 챙겨가자. 하하, 나 어디로 여행이라도 가는 걸까. 2박 3일 짐이 양손 한 가득이었다.  

   

배정받은 병실의 내 자리에서 북한산이 한눈에 보였다. 우리 집보다 뷰가 훨씬 좋았다. 나는 잠시 구파발역 근처에 듬성듬성 솟아나 있는 신축 아파트들의 전세는 얼마일지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어림도 없지. 6인실 병실에 나보다 먼저 와 있던 건, 폐에 물이 차서 수술을 막 받고 돌아온 젊은 여성이었다. 수술 부위가 아픈지 힘들어했다. 꼭 나이가 들어서만 병이 찾아오는 건 아닌가 보다, 확실히. 인생 어디쯤에서 질병은 그렇게 찾아오나 보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들이 특별한 것이 되어 내 몸이 되는 경험. 예측하지 못했던 알아차림이 일정 기간 동안 몸에 어떤 방식으로든 머무는 경험. 싫은데 내쫓을 수 없고 그냥 안고 있어야 하는 그런, 경험.         

    

A가 말했다. 병은 소문내야 낫는 거라고. 하지만 확진을 받을 때까지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병이 있다고 말하면 정말로 그 병이 생길 것만 같았다.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리고 소문을 내 봐야 뭐 하나 싶었다. 결국 질병을 감당해야 하는 건 내 몫인데 말이다.    

  

입원하는 동안 몇 차례의 검사를 통해, 유육종증을 확진받았다. 처음 의심된다고 했을 때부터 어색한 이름의 질병은 정말로 내 몸에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염증은 폐를 시작해 왼쪽 겨드랑이, 비장 쪽에도 조금 퍼져 있는 상태라고 했다. 다행히 눈이나 기관지, 심장으로 퍼지지 않았고 폐활량도 정상이었다. 


-

몸이 이 상태가 되면 분명히 엄청 피곤했을 텐데, 못 느꼈어요? 

아, 그냥 일이 많아서 그것 때문에 피곤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한국인들은 안 돼. 일을 너무 많이 하잖아. 

...    

-

   

의사는 폐에 염증이 생긴 지 꽤 됐을 거라고 했다. 몇 개월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오래. 유육종증 초기단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염증이 없어질 수도 있는데 나의 경우 염증이 계속 다른 기관으로 점점 퍼지는 단계였다. 그냥 일 때문에 피곤한지 알았다는 대답에 의사는 한국인의 ‘열일’ 특수성을 얘기했다. 순간 나는 일에 파묻혀 살다가 내 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도 못 챈, 모든 것을 제쳐놓고 ‘일만 하는’ 한국인이 되었다. 기분이 나빴고 머릿속에서는 단어들이 웅웅거렸다. 뭐야, 자기는 그럼 워라벨 다 지켜가며 일하는 사람인가. 저녁 있는 삶을 풍요롭게 누린단 말인가. 내 머릿속과 마음 구석구석 다 뒤져서라도 한국인의 속성이라고 할 수 없는 모든 특성과 기질을 탈탈 털어 의사에게 보란 듯 증명하고 싶었다. 실제로는 전혀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의사는 스테로이드를 처방해주었다. 내가 저체중이기도 하고 병의 진행 상태가 엄청 심각하지 않은 정도였고, 아직 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처방하는 것의 반 정도의 양을 복용하게 되었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주변 동료들에게 전해졌다. 고민하다가 연락한다는 동료들과 친구들의 연락이 소중하게 다가왔고 감사했다. 이래서 병은 소문내야 한다고 하는 건가. 나처럼 내 병이 생소한 친구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알쏭달쏭한 유육종증이 뭐냐며 물었다. 시원하게 대답을 해줄 수 없었지만, 내 몸에서 진행된 상황을 전달해 주었고 처음 내가 이해한 ‘자가면역질환’도 덧붙여 설명했다.   

  

A의 조언을 곰곰이 생각했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부터 확진을 받을 때까지 약 한 달이 걸렸다. 추가 검사를 진행할 때마다 나도 몰랐던 몸의 염증을 확인했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데, 분명히 몸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알렸을 텐데,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답답함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나였는데, 내 몸은 그 상당한 시간을 지금껏 잘 버텨주었다는 거다. 피곤하고 체중이 감소했지만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느끼게끔 해주었다. 폐에서 생긴 염증을 어떻게든 잘 다스려 보려고 노력한 다른 몸의 부분들도 있을 거였다. 알아차리지 못한 몸의 수고로움에 고마웠고, 또 대견했다. 그리고 무단히 병원을 갔던 ‘늦었지만 잘 작동한’ 육감에게도 감사했다.  


그렇게 몸이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병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몸의 고단함을 줄이고 더 나아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식을 먼저 듣고 연락해 준 친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기에, 지인들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지 보이지 않는 마음이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확실히 느껴졌다. A의 조언대로 내 몸의 유육종증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잠잠한 내 페이스북을 흔들어 깨웠다. 뭘 어떻게 알려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고민이 좀 되었지만 SNS 스피릿을 잃지 않기로 했다. 약간의 쿨함을 유지하자! 물론 친한 친구들에게는 직접 메시지를 써 알렸다. 어떻게 내 상태를 알려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나 좀 아프다 ㅎㅎ’ 하고 운을 뗐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15년 지기 친구들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생각지도 못하게 정말 많은 지인들에게 응원을 받았다. 살면서 가장 많이 받은 응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자신들의 질병과 지인들의 소중한 사람이 겪었던 어려움을 나누어주었다.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만 몰랐던 사실일까. 세상에는 평생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굳이 완치하지 않아도 괜찮은 질병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제야 부모님의 식탁에 널려 있는 당뇨와 고혈압 약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님 역시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하며 당뇨와 고혈압과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던 거다. 식사량을 줄이고 잡곡밥으로 바꾸고 건강 주스로 아침을 시작하는 일상. 


병을 발견하고 나서 수없이 물었다. 왜 하필 나냐고. 몸은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지만 대신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많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막이 하나 벗겨지는 듯했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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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bo Valdes & Chucho Valdes  "Tea for Two"

Juntos para Siempr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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