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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곰곰 Apr 08. 2019

어느 날 미용실

짜증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이었다. 짜증 나면 나는 무식해지고, 무식해서 용감해지고, 용감하다 못해  뭔가를 파괴하고 싶어 진다. 그게 하리보 젤리곰이든 내 위장이든 왼쪽 엄지손톱이든. 파괴할 거리를 찾으며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머리가 많이 자랐네. 오케이, 오늘은 머리카락을 파괴한다. 지체 없이 도서관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지. 멀리 가기 싫은데. 지도 앱을 꺼내지 않아도 갈 수 있는 미용실은 근처 대형마트 3층에 있는 곳 하나다.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주변에 여길 다닌다는 사람도 없지만 더 생각하기 귀찮다. 자전거에 올랐다.

평일 이른 오후라 미용실 안은 한산했다. 찾으시는 선생님이 있으신가요. 아뇨, 아무나 괜찮습니다. 잠시 후 젊은 남자 미용사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단발할게요. 앞머리 없이, 턱선보다 살짝 아래요. 아래쪽이 가볍게 떨어지도록 해 주세요.”

탈색을 할 만큼 용기가 적립되지는 않았다. 습관적으로 짜증을 폭발시켜온 날들로부터 배운 게 있다면 비가역적인 일을 조심하는 것. 사람한테 풀지 말고, 서류에 남는 걸 하지 말고, 나를 다치게 하지 말 것. 항상 잘 지켜온 건 아니지만. 또 다른 소소한 가이드라인이라면, 평소에 욕망한 적 없던 걸 저지르지 않기. 모처럼 모인 나의 용기란 이렇게나 소심했다. 어쨌거나 오랫동안 짧은 머리는 하고 싶었다.

학생이에요? 네. 어느 학교? 여기 근처 학교요. 공부 잘하나 봐요. 아 네... 남자친구는 있어요? 네. 직장인? 아뇨 대학원생. 공부 잘하는 커플이네~ 아 네... 머리 많이 자르는데 남자친구가 뭐라고 안 해요? 제 머리 제가 자르는데 왜 남이 뭐라고 하죠 그런 놈이라면 헤어져야죠. 하하 그러시구나 단호하시네요~ 아 네...

미용사는 말이 많았다. 말을 잘하거나 즐기는 것 같지는 않고 침묵을 못 견디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미용사님. 제발 목적이나 의미가 확실한 말을 해주세요. 공부 잘하나 봐요~라는 말에는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왜 제 연애 상태와 머리 길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보이시나요. 남자친구가 뭐라고 할 거라고 한다면 컷트를 멈추고 어떻게든 길게 수습해주시기라도 할 건가요...

어서 기술이 발전해서 투명 미용 가운이 상용화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컷트는 끝났다. 샴푸를 하고 드라이를 하니 머리 상태가 대강 눈에 들어왔다. 안경이 없어 흐릿하게 보였지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져서 좋았다. 적당한 직선과 곡선이 내 얼굴의 곡선과 조화를 이뤘다. 더 이상 잘 어울리는 머리스타일을 찾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 기뻤다. 미용사도 아주 흡족해 보였다. 거울 앞 선반 위에 두었던 안경을 다시 썼다.

아 고객님.. 렌즈 끼고 다니시면 안 돼요?

미용사 탐색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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