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카오산로드를 처음 만난 건 내가 다니던 대학교의 도서관에서였다. 대학내내 도서관 근로 장학생이었던 난 일주일에 3번 정도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다. 도서관 근로 장학생을 신청했던 이유는 옛날의 나는 꽤나 책을 좋아했었고, 어차피 살고 있던 기숙사와 도서관이 가까워서 직장이 근거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으며, 무엇보다 도서관 근무를 하다보면 썸을 타거나 러브레터 같은걸 많이 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그런 썸과 러브레터는 생길놈만 생긴다는게 세상의 이치다.
아무튼 난 도서관을 꽤 좋아했고, 도서관에 출근을 하면 책을 대출을 해주거나 서가 정리를 하거나 서가 정리를 하다가 맘에 드는 책을 한구석에서 읽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곤 했다.
"수레 한개씩 정리하고 옵시다."
반납 도서가 수레에 산을 이루고, 더이상 책 반납이 불가능해지면 도서관 선생님들은 근로학생들에게 수레를 하나씩 정리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통 서가정리는 근로학생들이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날 내가 맡은 수레는 여행쪽 서적이 잔뜩 꼽혀있는 수레였다. 투덜대며 수레를 끌고 여행서적쪽으로 향했을 때 내 눈을 사로잡은 책
벌써 13년 전이다.
낡을대로 낡아버린 기억이지만 수레안에서 카오산 로드를 집어들었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그 기억은 어찌나 생생한지 수레를 정리하러 들어갔던 서가 공기의 온도와 느릿하게 흘렀던 도서관의 분위기까지 모두 기억나는건 왜인지. 세계여행따윈. 아니, 외국이라곤 일본을 제외하고 단 한번도 나가본 적 없는 나는 '카오산'이란게 뭔지도 몰랐고, 그저 '카오'라는 생경한 단어가 있으므로 이건 '후지산' 처럼 다른 나라에 있는 산일꺼라 결론지었다.
대출 도서를 정리하다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있으면 서가 한쪽 구석을 수레로 막아두고 쪼그려앉아 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다. 칙칙한 표지색이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작가가 산에서 누굴 만났는지 궁금해 책을 열게 되었고, 그렇게 외국이라곤 나가본 적도 없는, 서울마저도 갓 상경한 뜨내기 촌년이었던 21살의 난 카오산을 만났다. 덤으로 책 속에서 나의 첫 여행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작가라고 해야 할까, 엮은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카오산의 어중이 떠중이들을 잡아다 어디엔가 앉혀놓고 사연을 들었던 사람은 그들의 사연을 모아 한권을 책을 만들었고, 그 책 속엔 그들 제각각이 여행하는 사연이 담담하고 차분하게 적혀있었다. 모두들 나와 비슷한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다들 장기여행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세계정복을 한다거나 대단한 꿈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길 위에서 한번쯤 자신을 내던져보고 싶었던 약간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때의 나는 늘 외로웠고, 답답했다. 미래라는건 안개가 잔뜩 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장마 한 철 속에 영원히 갇힌 듯 우중충하기만 했다. 가난해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었지만 동아리 행사에 학과 모임에, 학회에 가지도 못하고 과외를 전전했던. 나중에는 그 과외가 죽도록 싫어서 과외집 벨을 누르기 전엔 제정신이 아니고 싶어서 매번 레쓰비 3캔을 단숨에 들이키고 제정신인지 카페인을 맞은건지 알수없는 상태에서 후다닥 과외를 하고 뛰쳐나오던 내가 있다. 낯선 '서울'이란 도시에서 기댈 곳 없어, 기숙사 방에 자는 룸메이트가 꺨까봐 베갯잇에 코를 박고 훌쩍이던 찌질했던 나는
나도 길 위에 내던져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여행으로 뭔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허기짐을 조금이라고 채우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책 속의 누군가처럼 여행으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살짝 불쌍했던 20살의 난 그 책이 참 좋았나 보다.
그렇게 몇개월간의 과외비가 모였을까. 난 정말 아무것도 없이 배낭하나 딸랑매고 카오산으로 향했다. 심지어 가진돈도 별로 없었다. 비행기는 3개월 오픈이었지만 '카오산 로드' 이후의 여정은 없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건 그때 탄 비행기는 에바항공이었다. 당시만 해도 에바항공이 최고 항공사 등급을 받기 전이라 꽤 저렴한 가격에 탈 수 있었고 비행기에서 주는 빵이 무척 맛있어서 두개를 더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에바 항공에서 바구니에 빵 들고 다니면서 그 따끈따끈하고 버터냄새 진하게 나는 모닝빵 주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