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컸다. 나고 자랐던 '부산'도 큰 도시였는데. 그래서 절대 쫄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던 나는 서울에서 항상 쪼그라들기만 했다.
난 억세고 거친 부산말을 썼다. 대학 동기들은 내가 말을 하면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을 하든 웃었다. 이유는 웃기게 말한다는 거였다. 전혀 웃긴 말을 하지도 않았고 되려 진지하게 말을 했던 나는 그런 사소함에도 상처를 받았고, 이놈의 부산 사투리를 고쳐봐야겠다 마음을 먹어도 쉽지 않았다.
이젠 13년 차 서울 사람. 더 이상은 부산 사투리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나는. 그때의 내 대학 동기들이 내가 쓰는 부산말이 귀여워서 웃은 거라는 걸. 둔하고 바보 같았고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쳤던 난 몰랐던 사실이다. 요즘은 부산말로 귀엽게 이야기하고 싶어도 마음 같지 않다.
익숙해졌다 싶으면 새로운 얼굴로 바뀌는 서울이었다. 무표정한 사람들과 차가운 공기. 이곳에선 정말 내가 길거리에서 '악' 소리를 하고 죽어도
"뭐야. 괜히 귀찮게 되어버렸어."
라며 모두들 외면할 것 같았다. 이 차가운 도시에 도무지 정이라곤 들지 않았다.
카오산은 아니었다.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산이 없네!"
카오산 로드에 처음 내린 내가 한 말이었다. 아무런 조사 없이 동남아 백배 즐기기라는 책 한 권만 달랑 들고 온 나였다. 이곳에 '홍인인간, 동대문, DDM'이라는 숙소가 있고, 가격은 대략 하루에 2천 원이라고. 나는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드는 '홍익인간'으로 갔고, 다행히 방금 전 체크아웃을 한 사람덕에 침대 하나가 비어 있었다. 그 침대는 문 바로 앞에 있어서 하루종일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다가 내 침대를 걷어차거나 내 가방을 걷어차는 곳이었다.
그때의 난 그 침대에서도 쿨쿨쿨 잘 잤었다. 지금의 난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태국 와서 태국 음식을 먹을 줄도 몰랐던 난 온종일 홍익인간 1층에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만 번갈아 먹었다. 이런 나를 안쓰럽게 보던 홍익인간 사장님이
"친구는?"
사장님의 물음
"없어요. 혼자예요."
"그럼 저기 칠판에 이름 적어놔. 친구가 생길 거야."
홍익인간 입구에는 칠판이 있었고 그 칠판을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구인광고 비슷하게 사람을 구하는 곳이었다.
- 라오스 갑니다. 같이 가요.
- 미얀마 갑니다. 오늘밤 만나요.
나는 한쪽켠에
라고 적어놨다. 저렇게 성의 없이 적어놓고 누가 올까 싶어서 방긋방긋한 구름으로 내 이름을 꾸며놓고 별도 몇 개 쳐 뒀다. 그렇게 7시가 되었고, 놀랍게도 카운터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날 찾는 손님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사장님은 '것봐. 친구가 생기잖아.'라는 눈빛으로 날 빙그레 웃으며 쳐다봤다.
"윤선영 씨요."
라며 날 부르며 들어오는 사람 무려 9명. 그날 밤 3차까지 마치며 최종 5명이 남았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구인광고에 그리 끌려했는지 오랜 시간 미스터리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이를 적었더라.
그래. 그럴법하지. 어렸던 난 나의 나이가 권력이 될 수 있단 걸 몰랐고, 그걸 몰랐던 나였기에 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이 될 수 있었다. 며칠째 혼자 김치찌개만 시켜 먹던 여자애가 그날밤만은 카오산로드에서 친구를 만나 술을 먹고 즐거운 얼굴로 돌아오자 사장님은 술 취해 도미토리로 돌아온 날 향해 따봉을 날리셨다. 나도 같이 따봉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만난 5명과 캄보디아를 여행했고 그중 몇은 다시 태국으로 들어갔고 다시 몇몇과는 베트남을 여행했다. 어디서 헤어졌는진 모르겠지만 그들 모두와 헤어진 뒤에도 나는 누군가를 만났고, 한시도 혼자일 틈 없이 3개월을 꽉꽉 채워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영어를 1도 할 줄 몰랐던 그때의 난 신기하게도 싱가포르에서 온 빅터라는 남자도 만났다. 물론 그 친구는 싱가포르의 싱가포르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였고,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독일어까지 유창하게 하는 21살 동갑내기였다.
잠깐이었지만 여행하는 무리 내에서 빅터와 공식적 커플도 되었고(빅터가 첫 외국 남자친구다.) 빅터의 초대로 싱가포르에 놀러까지 갔었다. 그리고 빅터의 엄마와 아빠도 만났는데, 우리 엄마와 비슷하게 생긴 아줌마가 브로콜리 머리를 하고선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영어도 못하는 촌년은 그렇게 동남아를 싸돌아 다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한량백수들을 만났고, 술을 먹었고, 그러다 외국인 남자친구도 사귀었고, 그 친구덕에 싱가포르에서 한동안 지내며 남자친구와 브로콜리 원어민에게 영어도 배웠다.
별거 없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여동생이 있고, 그 여동생이 신나는 얼굴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면 난 어깨를 토닥이며
"참 잘했어. 네가 자랑스럽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돌아와서도 내내 여행의 기운이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태국에서 먹었던 볶음밥과 라오스에서 마셨던 비어라오. 캄보디아 무더운 앙코르와트에서 먹었던 똠얌꿍. 더 이상 외롭지 않았고 더 이상 베갯잇에 코를 박고 울지 않았다.
난 과외를 해서 여행을 갈 수 있잖아.
그건 엄청 멋진 거라고.
다들 모르겠지만 난 나 혼자 저벅저벅 걸어서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단 말이야.
이 세상에 알고 보면 이런 사람이 별로 없어.
그 후로 돈만 생기면 태국과 카오산을 내 집처럼 들락거렸고 매번 알라딘 바지에 싱하맥주 하나 끼고 길거리에서 자기소개를 하며 친구가 되었고 다시 길에서 그들과 헤어졌다. 만나고 헤어짐이 수없이 반복되었고, 이젠 내가 누굴 만났는지, '연락하자'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 말인지 알게 되었을 때쯤 카오산에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 카오산 이후 13년이 흘렀고, 이번엔 남편과 함께 카오산을 걸었다. 카오산로드에 즐비한 클럽들을 보니 같은 줄 알았던 카오산이 완전 그대로는 아니구나. 예전 이 거리엔 악사들이 있었고 저렴한 식당들이 있었는데, 이젠 길 전체가 나이트클럽인 것 같았다.
"그거 알아? 카오산 로드는 예전엔 거리의 악사들과 식당들이 있었어."
"그래? 근처에 딱 그런 곳을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어제 너 잘 때 나 혼자 나와서 근방을 둘러봤지."
카오산 터줏대감이었던 나도 모르는 곳을 네가 안내한다고? 나는 곰돌의 뒤를 졸졸졸 따라갔고, 곰돌은 잠재된 꼰대력을 발휘하며 카오산 근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귀여운 곰돌.
카오산의 정신없는 클럽거리 너머 옆 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엔 정말 내가 기억하는 카오산의 모습이 있었다.
소박한 식당들과 야외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싱하 한잔과 팟타이를 시켜 먹으며 길거리를 구경하는 외국인들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길거리 악사들의 노랫소리와
소수민족들이 들고 다니는 두꺼비 악기의 또로록 또로록 소리에 맞춘 여행자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간간하게 들리는 곳
바랜 기억 속 그 기분에 딱 맞는 곳이라서
"맞아. 여기야! 어떻게 알았어?"
곰돌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나를 현지인들이 많이 간다는 노천식당으로 안내했고
"너 현지인들이 가는 노천식당을 어떻게 알아?"
라는 말에
"어제 산책하면서 찍어뒀지"
하지만 정작 음식은 별 맛대가리가 없어 맥주나 들이켜야 했다.
마지막으로 갔었던 카오산 이후로 8년쯤 지난 것 같다.
카오산은 고맙게도 그대로 있어주었다.
가난했던 내가 밥을 사 먹던 노천도 그대로, 자주 가던 무슬리집과 팟타이 국숫집도 그대로.
모든 것이 저렴해서, 그래서 가난했던 나도 한없이 넉넉했던 그 공간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