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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Aug 13. 2019

잡으라, 전진할 것이니

어쩌다,수영

'드래곤볼의 에네르기파 같은 건가??'


록쌤은 '물잡기'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한참 하고 있었다. 팔을 꺾어 물을 잡아 뒤로 밀어내면 운동에너지가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하는 순간 물리 포기자였던 내 머릿속엔 엉뚱하게 '에네르기파'가 떠올랐다.


'물잡기'는 수영이 가진 여러 철학적인 면 가운데 하이라이트 격이다. 형체도, 색깔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물을 도대체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배우며, 또 가른친다는 말인가. 록쌤도 고백하지 않았던가. 오랜 기간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록쌤이 지켜봐 줄 수도, 대신해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물잡기'라고. 잡히는 물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물이 손과 팔에 걸리는 느낌은 자신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록쌤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눈으로 보이는 동작을 교정해주는 것뿐이라고 했나 보다.


물잡기가 마치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드래곤볼의 '에네르기파' 같은 동작..이라고 하면 연배가 드러나니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게 마블을 인용하자면 스칼렛 위치가 염력을 사용하기 전 에너지를 모으는 손동작 같은 느낌이 되겠다. 물속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공처럼 있다고 생각하고 그 공을 팔꿈치를 구부려 잡아챈 뒤 허벅지 쪽 가상의 악당을 향해 밀어내면 거짓말처럼 내 몸은 쑥 앞으로 나아간다.


수영을 시작한 이후 수영장에서 다양한 버전의 몸개그를 선보였지만 한여름 워터파크를 방불케 하는 초급 레인의 한 구석에서 혼자 이리저리 해보는 자유형과 접영의 물잡기 연습은 몸개그 중에서도 포토제닉상 수준이다. 풀부이를 끼고 어설프게 둥둥 뜬 채로 유연하지도 않은 어깨와 팔꿈치로 물을 잡는다는 건 한겨울 펑펑 내리는 눈을 소중하게 손에 담아 집에 가져가겠다고 하거나 사하라 사막의 모래를 욕심부려 한 움큼 집는 것 같은 느낌과 다르지 않으리라.

물잡기 훈련법이라고..(벌서는거 아닙니다). swimoutlet.com


할머니들의 '쯧쯧' 혀 차는 소리가 귀에 맴돌고 초등학생들의 '저 아줌마 왜 저래?' 하는 눈빛을 뒤로하면서 나는 쉴 새 없이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물을 잡으려 팔을 구부리고 뒤로 밀고, 구부리고 뒤로 밀었다. 의미 없는 헛손질 퍼레이드로 제자리에서 나는 빙글빙글 돌았다. 통나무 같은 몸뚱이가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뒤집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여전히 난파선 같은 내 일상 역시 헛손질 헛발질 투성이다. 하루는 외근 후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회사 단톡방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메시지와 전화에 동시에 응답하느라 건대입구역에서 회사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2호선 열차를 타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건 다행히 신도림이 아닌 잠실역 직전이었다. 나는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미로 같은 잠실역 안을 걷고 또 걸어 시청행 열차에 간신히 몸을 실었다. 환승 노선에서 하는 헛다리질이야 졸면서 2호선을 기본 세 바퀴는 돌아야 어디 가서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다 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여름휴가 맞이 호텔 체크인 날 새벽 고열의 아이를 들쳐업고 내달린 응급실. 호텔과 달리 들어갈 땐 마음대로 들어가도 나올 땐 마음대로 나올 수 없다는 그 악명 높은 응급실을 '원인불명의 고열'이라는 진단과 함께 8시간 만에 탈출했는데,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 아기는 실내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결국 눈두덩이를 다쳐 또다시 응급실로 내달린 상황.


마치 못된 마법사의 신기루 마법에 빠진 것처럼 하루하루 어딘가로 열심히 걸어도 늘 같은 풍경을 보는 듯 끔찍한 데자뷰의 연속인 그런 날이 있다. 그래도 열심히 헛손질이라도 하다 보면 뭐든 잡히겠거니 하면서 미련하게 열심히 사는 내 인생은 어설픈 내 물잡기와 꼭 닮았다. 다음 주 로또 조각으로 다시 환생하는 '로또 5등' 당첨만큼이나 제자리걸음이다.  직장생활 12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걸 쥐려 무호흡인지 네 번에 한번 호흡인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눈을 부릅뜨고 물을 잡아댔건만 야속한 물은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버린 것 같다. 나는 도대체 이 순환선의 어디쯤에서 표류하고 있는 걸까.


오늘은 그저 단 한 방울의 물만 잡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얼떨결에 손과 팔에 진짜 '에네르기파'가 걸리며 한 걸음 나아갈 때가 있다. 마치 응급실도 한 번이 무섭지 두 번째는 좀 더 담대해지는 것처럼. 빙글빙글 요지경처럼 도는 순환선에서 '아이고 잘 잤네. 좀 더 자고 반 바퀴 더 돌아야겠다' 생각하는 것처럼. 매일 반복하는 백번의 헛손질은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그리고 좀 더 너그럽게 만든다. 잡히지 않는 걸 잡는 게 대단하지 못 잡는다고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그거 아세요? 저 물을 잡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냔 말이다.


허공에 의미 없는 헛손질을 하는 것 같지만 손과 팔에는 어쨌거나 한 줌 이든, 한 움큼이든 물이 거기에 있는 한 무언가 잡히게 되어있다. 사막의 모래가 전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 반짝이는 마지막 한 조각은 남기 마련 이리라. 우리 인생은 참을 수 없이 가혹하면서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자비롭다. 수영의 마법은 그래서 언제나 포기하는 순간 시작된다. '오늘은 그저 한 줌의 물만 잡아도 좋겠다'는 생각 조차 들지 않는 그런 절망적인 순간, 바로 그때 만화처럼 '에네르기파'가 시작된다. 그러니 쉬지 않고 잡으라! 그리하면 전진할 것이니.


커버 이미지: Boyscouts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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