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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Sep 18. 2019

펑키타를 선물할게요

어쩌다,수영


엄마가 수영을 시작한 이후 엄마의 생일 선물은 늘 수영복이다. 엄마의 취향은 한결같지만 그 와중에 '젊어 보이고 싶다'는 디테일이 들어가 있다. 엄마가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하면 나와 동생이 무한 검색을 시작하는데 검색 키워드는 늘 '5부', '민망하지 않은', '야하지 않은' 등등이다.  


어깨끈 색깔이 빨간 검은색 5부 수영복은 '어깨 끈 색깔이 빨간색이라 야하다', 같은 디자인에 얇은 보라색 끈 수영복 사진을 보냈더니 '끈이 얇아서 민망하다', 그렇다면 검은색 바탕에(물론 끈도 검은색이다) 가운데에 산뜻한 핑크색으로 브랜드 이름이 적힌 수영복 사진을 보냈더니 '옆 레인 아가씨가 입었는데 나 같은 아줌마가 아니라 아가씨들이 입는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와 동생은 결국 참다못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엄마!! 수영복도 운동복인데 야하긴 뭐가 야해, 그리고 수영복에 나이가 어딨어!"


나는 어떤 운동을 시작할 때든 초기부터 불치병 수준의 장비병을 앓는지라 한참 요가에 빠져있을 때는 거의 강습비를 결제하고 정기적으로 새 요가복을 장만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영은 요가와 달리 수경과 모자까지 필요하고 오리발이라는 복병까지 있었다. '수영복은 소모품'이라는 그럴싸한 명분도 있지 않은가! 제자리걸음인 수영실력과 달리 수영복은 점점 늘어났고 급기야는 '펑키타', '졸린', '나이키' 같은 브랜드 수영복의 화려한 색감의 유혹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펑키타 정도는 엄마도 입을 수 있을 거야. 호주에서는 할머니도 입는데 뭐. 나랑 엄마, 딸까지 삼대가 같은 수영복을 입으면 얼마나 예쁘겠어.' 그나마 얌전하고 다소곳한 색깔과 디자인의 펑키타 수영복 사진을 골라 엄마한테 보냈다가 역시나 대차게 거절당했다.


"할매가 이런 걸 어떻게 입어!"


이게 뭐가 야한가요 funkita.com




지금은 원색 수영복 앞에서도 머뭇거리지만 40년 전 엄마의 정체는 사실 '멋쟁이'였다. 이모와 막내 외삼촌의 증언을 종합하면 엄마는 20대 초반 월급의 대부분을 옷값으로 탕진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릴 적 엄마의 옷장에는 멋들어진 바바리가 걸려있었다. 오버핏에 헐리웃 스타들이 입을만한 옷이라 키가 큰 엄마한테 예쁘게 어울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엄마가 그 옷을 입은걸 거의 본 적이 없다.


등원 준비와 출근 준비를 동시에 하느라 씻을 시간도 없는 내 몰골을 생각해보면 엄마는 그 시절 도무지 그런 옷을 입을 일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정이나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시기는 엄마는 선녀 옷을 잠시 옷장에 넣어두고 고향인 하늘나라는 커녕, 동네도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다. 먹는 것 입는 것 모두 아이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그 시기, 우리가 자라는 동안 엄마의 행동반경 역시 늘 동네에 머물렀고, 우리의 주된 쇼핑 무대는 '무조건 5000원'이라는 종이가 붙은 시장이거나 대부분 할인점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야해서 못 입는다'며 펑키타는 거부했지만 내가 크리스마스나 생일을 핑계로 사서 선물하는 화려한 디자인의 제작 수모는 못 이기는 척 받아 들곤 한다. 그리고 '아줌마들이 역시 딸이 최고래'하면서 수영장에서 은근슬쩍 딸 자랑을 늘어놓는다는 걸 털어놓는다.  이따금 엄마네 수영장에서 함께 수영을 할 때면 나는 일부러 엄마와 같은 디자인으로 산 커플 수영모자와 함께 원색의 화려한 수영복을 챙겨간다. 엄마는 그런 수영복을 입고 엉망진창 수영을 하는 내 모습을 고슴도치 엄마처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역시 젊음이 좋아. 수영복이 화사하고 너무 예쁘네"라는 말과 함께.


고요했던 엄마의 공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그 안방 옷장 안에 엄마의 20대가 고이고이 걸려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옷장에서 수십 년을 잠자던 그 멋들어진 바바리를 엄마는 한 두 번 꺼내 입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듯, 엄마도 그 선녀의 날개옷 같은 바바리를 입고 과거로, 20대 초반으로 훌훌 날아가고 싶은 날이 왜 없었을까. 옷장에서 잠자는 신세가 되더라도 언젠가는 엄마에게 펑키타를 한 번 선물하고 싶다. 착한 요정의 마법처럼 펑키타가 환갑이 지난 엄마의 멋쟁이 본능을 일깨워 주기를.







 커버사진: reader's digest/www.r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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