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은 쉽고 명확한 게 최고!
역시 서가 명강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유행할 때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를 읽었습니다. 이 책 <남에게..>는 쇼펜하우어 말년에 발표했는데 갑자기 유명해지면서 쇼펜하우어 역주행 신드롬을 불러온 책 <소품과 부록>의 "소품" 부분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그래서인지 시대에 맞지 않아 가독성이 떨어지고 뭔가 시원하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저 대충 쇼펜하우어에 대해 맛을 봤다는 것에 만족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거시커니한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서가 명강 시리즈로 출간된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는 쉽고 명확합니다. 서울대 철학과 박찬국 교수님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정리하고 초보자에게 강의하는 느낌으로 설명합니다. 강의를 잘하셔서 그런지 책으로 정리된 텍스트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니 비로소 쇼펜하우어가 어떤 철학을 설파했는지 전반적인 내용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는 저 같은 일반 독자에게 너무 좋은 책입니다. 읽기 쉽고 내용 정리가 너무 깔끔합니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읽어도 이해 안 되는 어렵고 난해한 책을 읽는 것은 더욱 큰 고통입니다. 사는 게 고통인데 노력이 드는 독서까지 거기에 일조할 필요는 1도 없습니다. 이렇 때는 왜 사는 게 고통인지 알려주는 것조차도 아주 쉽고 스무스하게 해줘야 들을 의지가 생깁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읽으면서 부담 없고 오히려 하나하나 알아가는 즐거움이 쏠쏠했던 책입니다.
2. 쇼펜하우어가 본 인생의 본질
이 책이 정말 좋은 것은 쇼펜하우어의 철학 사상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내용이 많다 보니 읽을 때는 끄덕끄덕하며 감탄하지만 휘발성 메모리를 장착한 저로서는 감탄을 했다는 사실만 남았습니다. 그리하여 쇼펜하우어, 염세주의, 대세에 반대, 비주류, 끝물에 겨우 역주행, 요즘 대 유행, 극단적, 그래도 새겨들을만, 이런 단편적인 인상만 남았던 것입니다. 거의 유일하게 기억하게 되는 것은 인생의 본질을 고통과 권태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명제가 처음에는 무척 이상했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완전히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본질은 고통과 권태의 강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인생이 고통에 허우적대는 것은 욕망 때문이라고 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봅니다. 이성은 그저 감정을 돕기 위한 도구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무척 타당한 견해라고 봅니다. 제가 별로 이성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사실 인간은 다양한 욕망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욕망에 기반한 감정은 사실 소중합니다. '먹고 싶다. 사고 싶다. 가고 싶다. 하고 싶다.' 와 같은 모든 기본적인 욕망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강제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모두 욕망의 결과입니다. 자신의 생존뿐 아니라 인간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위험한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의 대표가 된 것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인간이 잘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롭고 타인도 괴롭힌다고 보았고 그래서 인간 세상이 거의 지옥도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기본적인 욕망을 어느 정도 만족하고 나면 권태에 빠집니다. 욕망이 기본인데 더 욕망할 것이 없으면 지루해지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 당시 먹고살기 힘든 대다수의 평민들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 고통스러운 존재로 의식주에 어려움이 없는 귀족들은 권태에 빠진 존재로 보았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에 이런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특정 욕망이 충족되더라도 또 다른 욕망에 집중하거나 다른 욕망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만족의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욕망이 채워져도 지루해서 권태로우니 그 또한 고통의 연속입니다. 이 외에도 디테일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많고, 신에 대한 힘 빠지는 관점도 무척 재미있었지만 어차피 잊어버릴 테니 욕망과 고통과 권태만 기억하도록 합니다.
3. 쇼펜하우어도 나도 당신도 참 고생이 많다.
사람은 세상에서 고독한 존재지만 그렇다고 산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서은국 교수님의 간단 명료한 정리처럼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조건은 신뢰하고 사랑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나눌 때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서로 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과 센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염세적인 생각으로 꽉 찬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상대하며 사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고, 스스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더 답이 없습니다. 이 와중에 똑똑하기까지 해서 사람들이 다 멍청해 보이고 몇몇 천재나 자신과 궤를 같이 하는 철학의 소유자만 좋아한다면 두루두루 동글동글 사는 것은 포기 상태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성장 과정과 가정 형편, 부모와의 관계 등을 생각하면 세상과 잘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경제적 여유는 있어 철학적 성취라도 있었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사람 구실을 했을까 싶습니다.
이 양반이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천운이었는데 스스로도 인지할 정도였습니다. 쇼펜하우어의 환경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양반이 똑똑한데 삐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엇나가는 사춘기 소년의 태도와 방식으로 자신의 삐딱한 철학을 정립시켜 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삐딱하다고 표현했지만 그저 누군가에게 배운 지식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수순으로 가지 않고 스스로 관조하고 터득한 이치를 글과 철학 이론으로 정리한 것이라 대단합니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는 그저 당연하게 생각해왔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던 부분, 살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아 조급하고 답답했던 모습을 돌아보고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해 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양반의 생각이나 주장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상당히 편협한 느낌도 들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속 시끄러웠던 부분을 해소해 주기도 했습니다. 저도 당신도 힘든 세상에 태어나 고통받기도 하고 때로는 짧은 행복으로 살만하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와중에 쇼펜하우어처럼 다소 생소하지만 새로운 시각과 사상을 추가해 나간다면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