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머그컵에 전기포트로 끓인 물을 부었다. 모과향이 퍼졌다. 여자는 식탁에 앉아 모과차를 마셨다. 육질을 잘게 썰어 설탕에 절인 모과차는 달고 쌉쌀했다. 모과나 생강을 다져 켜켜이 쌓고 설탕을 넣어 만든 차 종류를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자는 설탕에 절인 모과차를 며칠째 한 잔씩 마셨다.
모과차를 만들어 여자에게 준 사람은 여자의 엄마였다. 엄마는 말했다. 몸에 좋은 거니까 매일 한 잔씩 마시라고. 여자가 집에서 담근 과실차를 꺼렸던 이유는 설탕으로 뭉쳐진 묵직한 단맛 때문이었다. 묵직한 설탕의 단맛은 차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차는 엷고 가벼워야 한다고 여자는 생각해왔다. 하지만 달디 단 모과차도 마셔보니 좋았다. 엷고 가벼운 차만 있는 것보다 설탕으로 절인 달디 단 과실차도 있는 게 더 좋았다.
여자는 첫째였다. 여자의 엄마는 아이 셋을 자연유산한 후 여자를 낳았다. 여자는 엄마에게서 그 말을 몇 십 번이나 들었다. 세 번 유산 끝에 들어선 아이였기 때문에 여자를 임신했을 때 또 잘못 되지 않도록 공을 들이고 애를 썼다고 했다. 여자가 태어나고 동생 둘이 더 태어났다. 셋 다 두드러지는 것 없이 일반적인 아이들이었다.
여자는 자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여자가 낳은 아이는 남자아이였다. 아이 역시 두드러지는 것 없이 일반적이고 평범한 아이로 태어났다. 바꿔 말하자면, 여자는 정상 범주에 속하는 인간으로 태어나 정상 범주에 들어맞는 아이를 낳은 셈이다.
오래 전 아이를 임신했을 때 여자는 희미한 불안을 느끼곤 했다. 태동인 느껴지자 불안은 좀 더 농도 짙어졌다. 아이의 상태에 대한 걱정이 만든 불안이었다. 이 아이는 건강한 아이일까. 바꿔 말하자면,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아이가 뱃속에 들어있는 건 아닐까. 열 달 동안 아이를 뱃속에 품어본 세상 모든 여자들이 해왔고, 하고 있고, 하게 될 걱정을 여자 역시 예외 없이 거쳤다.
여자가 낳은 아이는 ‘정상’이었다.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강한 아이였다. 아이는 갓 태어난 순간에는 쭈글쭈글한 피부와 뭉뚝한 이목구비 때문에 못나보였지만 삼사일 지나자 여자가 상상했던 신생아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생후 십 개월이 되자 걸었고, 돌 무렵에는 달리듯 걸음을 뗐다. 아이가 한 첫 말은 ‘엄마’였다. 아이는 성장 단계에 맞추어 커나갔다. 행복해지기 위해 아이를 낳은 건 아니었지만 아이는 많은 순간 여자를 활짝 웃게 했다.
여자는 아이를 하나만 낳았다. 하나만 낳겠다는 생각은 아이를 낳기 전부터 했던 생각이고,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여자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의 해리엇이 꿈꾸었던 삶과는 다른 삶을 지향했다. 여자가 지향한 삶은, 자녀를 여럿 낳아 키우며 음식을 차리고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가족 공동체 삶이 아니었다. 여자는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원했고,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원했다.
그런데도 여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여자는 다수가 속한 일반적 규범의 삶을 따르면서 소수의 삶을 지향했다.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있었으므로 여자의 삶은 모호하고 불확실했다.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동안 여자는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여자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지향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고 지냈다.
해리엇이 아이를 많이 낳기 원한다는 이유로 비난 받듯 여자는 아이를 하나만 낳았다는 이유로 비난 받았다. 아이를 하나만 낳는 건 이미 태어난 아이를 외롭게 만드는 엄마의 이기심이며, 형제가 없는 아이는 사회성에 문제가 있거나 이기적이기 쉽다는 말들을 충고와 조언으로 들었다. 자녀 둘과 부모로 구성된 ‘4인 가족’이라는 규범화된 범주에서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행운이란 걸. 많은 여자들이 정상범위에 속하는 아이를 낳지만 모든 여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유전이나 환경적 요인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일반적인 규칙에서 벗어난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아이가 뻣뻣하고 무겁고 누르스름한 근육질 몸집을 갖고 태어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1분도 안되어 한쪽 젖을 다 비우고 무겁고 탁한 목소리로 ‘난 먹을 걸 원해’라고 첫 말을 내뱉었다면, 거칠고 포악한 본능을 가졌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것이다. 커다란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이 마개를 뺀 배수구 속으로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가듯 여자의 인생은 송두리째 휩쓸려버렸을 것이다.
해리엇이 낳은 다섯째 아이 벤은 선천적 돌연변이다.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운, 한때 지구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멸종된 종족으로 묘사되는 벤은 유년기를 지나자 문제아나 루저로 분류되는 또래들과 어울린다. ‘정상’적이고 평범하며 일반적인 사람들 눈에 이질적인 대상으로 보이는 부류들과. 그러나 그들 역시 벤과 같지 않다. 그들은 덜 떨어져 보이지만 벤은 그 자체로 원숙하고 완전한 존재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의 규범화되지 않은 야생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벤은 자신과 같은 종족을 찾는다. 사람들 얼굴을 한 명씩 시선을 못 박고 쳐다보면서. 하지만 어느 누구도 벤과 같지 않다. 여느 누구와도 다르기 때문에 그는 외로울 것이다. 다르다는 이유로 감시당하고 보호소에 보내져 구속복에 갇힌 채 마취제를 맞고 격리당하는 자의 외로움과 울분이 살아있는 내내 그를 따라붙을 것이다. 거머리처럼 악착스럽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자 역시 이질적인 것, 잘 모르는 낯선 것들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었다. 여자가 갖고 있는 낯선 것에 대한 공포는 자기방어이기도 하지만, 정상범주에 드는 평범한 인간들의 전형적이고 과도한 행동 패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공포와 혐오를 일으키는 대상은 거칠고 통제 불가능하거나 불균형한 외모를 가진, 한 눈에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부류들이 아니다. 소설 속 벤이나 벤의 패거리와 같은 부류들. 그들은 눈에 띄므로 경계하면 맞닥뜨릴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여자가 보기에 격리되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정상’으로 태어나 ‘정상’적인 사회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서서히 괴물이 되어버린 부류들. 어떤 괴물은 괴물임이 발각되기도 하지만 어떤 괴물은 발각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어떤 괴물은 괴물임이 밝혀진 지 오래인데도 괴물이 아닌 척 살아간다. 후천적 돌연변이인 그들은 격리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른다.
아이가 어렸을 때 여자는 아이에게 매일 밤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아이는 여자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여자가 들려주는 동화를 들었다. 여자가 자주 읽어주던 동화에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는 동화도 있었다. 아이는 자라서 십대 후반이 되었다. 언젠가 아이는 집을 떠나 사회로 나가게 될 것이다.
여자는 식탁에 앉아 아이를 기다렸다. 아이가 외출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아이는 지금쯤 집으로 오기 위해 공원을 가로지르고 있을 것이다. 아이는 올 해 열여섯 살이 되었다. 동화 속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진짜 괴물들이 사는 나라 사이를 가로지르는 어떤 길을 지나고 있는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