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아이였을 때, 여자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냇가가 있고, 마을을 지키는 백년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고, 양은 주전자를 가져가면 술독에서 막걸리를 퍼 찰랑거리게 채워주는 가게가 있는 마을이었다. 여자가 살던 집에는 꽃밭이 있는 앞마당과 장독대가 있고 대숲으로 이어진 뒷마당이 있었다. 뒷마당에는 우물도 있어서 두레박을 드리우면 이가 시리도록 차고 맑은 물을 퍼 올릴 수 있었다.
여자는 그 마을에서 열 살 무렵까지 살았다. 태어나 자란 곳이므로 여자에게 그 작은 마을은 고향이었다. 고향인 작은 마을에서 사는 동안 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순하고 통통하고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여자아이였다. 누구도 여자아이를 내리 누르지 않고 추켜세우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니 어릴 적 여자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냥 여자아이인 자기 자신이었다.
열 살이 넘자 여자는 작은 마을을 떠나 서울로 왔다. 여자에게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겼다. 서울 시민이라는 정체성이었다. 새 정체성에 맞는 몇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했다. 여자보다 먼저 서울 시민이었던 주위 사람들과 비슷해지기 위한 몇 가지 요소. 먼저 말을 바꾸기로 했다. 말을 바꾸기 위해, 새로 사귀게 된 친구들을 매개체로 삼았다. 여자는 그들의 말투를 유심히 듣고 익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마을에서 쓰던 사투리를 버리고 표준 말씨를 쓰게 되었다. 억양은 쉽게 익혔지만 몇몇 글자의 발음은 바꾸지 않았다.
친구 한 명이 중학생이 된 여자에게 물었다.
넌 왜 여의도를 여으도라고 해?
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줄곧 ‘의’를 ‘으’로 발음해왔다는 걸 알았다. 그 뒤로 여자는 의를 발음할 때면 의식적으로 ‘의’로 발음했다. 여자는 서울 시민이 되었다. 첫 번째 탈피였다.
여자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여자는 문학을 전공했다. 여자는 시를 습작하다가 소설을 습작했다. 여자는 시를 읽고 소설을 읽었다. 황지우와 최승자와 최하림의 시를 읽고 최인훈과 최인호와 오정희의 소설을 읽었다. 스무 살과 스무 살을 갓 넘은 시절 읽은 시와 소설들은 여자를 매혹시켰다. 여자는 한숨짓고 전율하면서 사로잡힌 채 읽고 또 읽었다.
여자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소설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여자는 글을 썼다. 여자는 문학이 주는 아름다움에 매혹을 느꼈다. 시 같은 문장, 시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여자는 자신이 읽은 소설들을 매개체로 삼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은 어느 누구도 주입하지 않은 자발적 열망이었다.
여자는 소설가가 되었다. 두 번째 탈피였다.
여자는 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말수가 적고 여자가 하는 말들을 그냥 듣기만 했다. 남자는 여자를 가르치려 들거나 지적하거나 억누르거나 추켜세우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열렬한 감정 없이 삼년을 만났다. 여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남편을 매개체 삼아 아내가 되고, 아이를 매개체 삼아 엄마가 되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학부모가 되었다. 세 번째 탈피였다.
사랑이 뭘까. 여자는 가끔 생각했다. 여자는 사랑에 관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키쉴롭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와 알랭 코르노의 ‘세상의 모든 아침’을 보았다. 여자는 사랑이 뭔지 책과 영화로 익히며 사랑을 현실 너머 어슴푸레한 것, 유토피아 같은 거라 여겼다.
여자는 몇 번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었다. 고백을 들으며 여자는 담담했다. 고백을 듣고 눈물 흘리는 여자들 범주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사랑 받고 싶다는 마음과 사랑 받는 게 뭐 별 건가, 하는 마음 사이에서 시소 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살갗이 벗겨진 자’이며 ‘고행자’이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라고 롤랑 바르트는 적었다. 여자가 생각하는 사랑은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을 텍스트로 쓴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적힌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은 없었으므로 누군가의 사랑한다는 고백은 스며들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여자는 10대와 20대 때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고 많은 순간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30대가 되고서야 여자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힘껏 사랑해주었다. 스스로를 사랑해주니 좋았다. 사회적 위치도 자산도 없고 제대로 성취해 낸 것도 없었지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보살폈다. 진정한 첫 번째 탈피였다.
여자도 많은 순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존 밴빌의 소설 ‘바다’ 속 주인공처럼. 더 능력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면,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젊은 시절을 더 나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냈더라면, 결혼해서 일과 살림을 병행하는 대신 글을 썼더라면, 사람들과 섞여 시간을 보내는 대신 자신에게 집중했더라면, 목표가 있는 삶을 살았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인생에서 결정적인 시기를 지나고, 몇 년 동안 매달려 노력했던 것이 결국 허상이었음을 알게 되고, 삶에서 이루어놓은 게 없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후 여자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야 여자가 원해온 인생인 몰입해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티브이 앞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무기력한 날들이 닥치지 않을 수 있다고,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뼈아프게 다짐했다. 티브이 앞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무기력한 노년은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생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인생의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이 작동한다고 느꼈다. 의도적으로 살지 않았던 삶에서 의도적으로 사는 삶으로 이동할 거라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여자는 알고 있었다. 바닷물이 조수로 불어나 조용하지만 커다란 움직임으로 출렁 흔들리며 자신을 다른 자리로 옮겨 놓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란 걸. 자신을 둘러싼 풍경은 그대로일 거란 걸. 여자가 원한 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아, 늙어서도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여건을 갖는 거였다. 몇 번의 탈피를 거친다 해도 그 바람만은 변치 않을 것이었다.
여자는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좋아했다. 뱅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고 공부하며 소설을 쓰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녀의 소설에는 짙게 배어있었다. 줌파 라히리는 첫 소설집 『축복받은 집』으로 오헨리 문학상과 펜/헤밍웨이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주목 받았다. 이후에 펴낸 소설들도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줌파 라히리는 어느 날 이탈리아어에 매혹을 느껴 영어로 써서 이룩한 영예를 뒤로 하고 새로 익힌 이탈리아어로 더듬거리듯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자는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써서 번역된 책들을 읽었다. 얇고 작은 책이었다. 몇 개의 글이, 짧은 에세이와 짧은 소설이 실려 있었다. 익숙한 영어를 버리고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낯선 언어로 써내려간 글들, 영어로 쓴 글들보다 훨씬 단조롭고 짧은 글들을 여자는 일부러 시간을 들여 오래 읽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던 스스로의 욕망이 소리 나는 들끓는 주전자처럼 시끄럽게 느껴졌다.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다른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자신을 지키려는 자의 담담한 아름다움이 줌파 라히리의 작고 얇은 책에는 배어있었다.
오래 전 아이였을 때 여자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냇가가 있고 마을을 지키는 백년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고 양은 주전자를 가져가면 술독에서 막걸리를 퍼 찰랑거리게 채워주는 가게가 있는 마을. 꽃밭이 있고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고 장독대가 있고 대숲이 있고 두레박을 드리우면 이가 시리도록 차고 맑은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우물이 있는 집이 있던 마을. 그 마을에 사는 동안 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냥 여자아이인 자기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