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기침을 계속해서 집에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그랩을 불러 학교로 향했다.
아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직원에게 물었다.
기침을 하면 집에 돌려보내는 게 당신들의 정책인지.
반은 항의였고, 반은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아이가 집에 간들
이미 지불한 수업료와 점심 비용은 환불되지 않으니까
현실적인 이유에서 한 항의였고,
내일 또 기침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내일도 보내지 못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아이의 고열은 이제 진정세를 보였고
콧물 조금과 기침이 문제였다.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씌워 보냈는데
그걸로는 불충분했던 모양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기침과 관련된 매뉴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연락을 했다고.
졸지에 아픈 아이를 학교에 보낸
무자비한 엄마가 되었다.
워킹맘 때 습관이 남아있어서일까?
아이의 고열은 우리 집의 가장 큰 이슈였다.
남편이 연차를 쓰거나 그게 불가능하면
시골에서 농사짓는 친정아버지가 올라오시거나
졸업시험 준비하는 사촌동생을 불러 알바비를 줬다.
이 일로 남편과 다툰 적도 많다.
나보다는 연차 쓰기가 쉬운 남편에게 요구를 많이 한건 사실이나, 남편이 안된다고 했을 때 비난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남편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열이 나는 게 아니라면,
콧물, 기침 그런 감기 증상으로는
유치원을 빠져본 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굳이 이곳에 있는 걸까?
나 혼자 아파서 숙소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덜했는데
아이까지 아파서 학교도 못 가고 숙소에 있다 보니
괜히 집생각도 나고 본전 생각도 났다.
제일 큰 목적이 아이의 현지학교 스쿨링이었는데
며칠 못 가게 되자 상심이 컸다.
7주라는 시간 중 그리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나 역시 이미 한 번의 발리밸리 이후 여전히 잦은 설사에 시달리고 있고, 감기 증상까지 더해져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인지라, 이럴 때는 생각이라는 게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고 감상적이 되지 않던가!
우리의 몸이 언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고
또 이렇게 아프지 말란 법도 없다.
그 고생을 사서 할 만큼 값어치가 있는 걸까?
한 달 살기를 계획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염두에 두길 바라는 부분이다. 물론, 나도 그랬지만, 새로움에 대한 부푼 기대와 설렘으로 그때는 전혀 개의치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여기에 있고 돌이킬 수 없다.
오늘 하루 종일 아이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은 다름 아닌,
Be positive!
나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했다.
나와 아이가 겪는 고난이 가치가 있다고 느낄 만한 걸 하나씩 찾아보자.
삭막한 아파트뷰가 아니라 요정의 정원 같은 뷰를 보며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할 수 있다.
덥지만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시원하다.
매일 매일 그토록 좋아하지만 키울 수 없는 고양이를 만날 수 있다. 멀리 걸어가는 벨라를 보고 “벨라”라고 불렀을 때, 나를 쳐다보고 “야옹”거리며 다가오는 벨라를 보는 즐거움이란! 신기한 건 이녀석은 자기가 이 숙소의 집사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매일 마다, 특히 새로운 게스트가 왔을 때면 그 게스트의 방 앞에 이렇게 누워있는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사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도 우리 방 앞을 3일동안 지키고 있어서 우리한테만 특별한 건줄 알고 설렜는데 그건 아니었다. 민박집 고양이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일 뿐!
어제는 처음으로 테니스 수업을 등록해서 참여했다.
처음부터 개인 레슨을 받기는 부담스럽던 차에
초급자용 수업이 있어서 신청했다.
예전부터 테니스를 배워보고 싶었지만
누구나 그렇듯,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배울 데가 없어서 등의 핑계로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질 못했다.
그런데 운 좋게 숙소 바로 근처에 테니스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있고 앱으로 손쉽게 코치와 코트 예약도 가능했다. 물론 테니스 레슨 가격은 한국만큼이나 비쌌지만 나머지 두 가지 조건은 충족이 되었으니 이 참에 배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4명이서 들었는데 코치가 두 명에게 특별 레슨이 필요하다고 조언해 줬다. 물론 그중 한 명이 나다.
원래 운동에 소질이 없어 크게 놀랍진 않았다.
그저 비싼 개인 레슨을 받아야 할지, 염치 무릅쓰고 또 초급자용 반에 신청할지 고민 중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나처럼 특별 레슨이 필요한 인도네시아 여성과 레슨 후에 즐겁게 수다를 떨 수 있었다는 것! 처음에는 레슨 어떻게 할지 얘기하다가 점점 사회, 교육 등 깊은 주제로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쇼핑몰이라니! 여기 사누르에?!”
그녀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모든 변화가 너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어지러울 지경이라고, 관광업 자체를 뭐라 할 순 없지만 정부가 모든 허가를 너무 쉽게 내주고 있어 어딜가나 공사판이라고 했다. 부패한 정부로 인해 이 땅에 미래가 없다고.
나는 그녀에게 위로를 건냈다.
“적어도 인도네시아는 젊은 나라잖아. 한국은 점점 늙어가고 있어. 우리야말로 어쩌면 더는 미래가 없을지도 몰라.”
그녀는 얼마전에 팟캐스트에서 한국의 낮은 출산률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며 그게 사실인지 재차 물었다.
한국인들이 왜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지
인도네시아는 어떤지 대화가 오고갔다.
그녀는 한국에 대해, 나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초급반을 신청한다면 또 만날 수 있겠지?!
오늘 조식 시간에는 테이블이 가득 찼다.
특히 8시라는 꽤 이른 시간에.
아이와 여느 때처럼 조식당에 갔는데 한 여성분이
“안녕”이라고 인사해 주셨다.
그때부터 그 분과 폭풍 수다를 떨게 됐다.
드라마나 케이팝을 통해 한국어 표현을 배웠는데
제일 좋아하는 게 “가자 가자.”라고 했다.
드라마 속 한국인들이 언제나 서두르는 모습이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영어도 너무 잘해서 신기했는데(단순히 발음뿐만이
아니라 제스처나 말하는 방식 등에서도) 알고 보니 자카르타 모 대학교에서 일하신다고.
얼마 있다가 어제 18시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다는 독일인 커플이 합석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독일에서는 ID Card에다가 기독교라고 명시하면 정부에서 세금을 떼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에나! 자카르타 교수님과 나는 둘 다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그 세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노숙자나 고아들을 위한 시설에 쓰인다고 했지만, 사람 기분이라는 게 내가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면 기분이 좋지만 세금으로 뜯기면 몹시 기분이 나쁜 법! 그래서 독일에서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라고 표시하지 않는 탈세인(?)들도 있다고. 또 놀라웠던 건 자카르타 교수님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었다. 발리에는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 아니냐고 했다가 교수님이 바로 정정해 주었다. 인도네시아는 모든 종교를 포용한다고, 이슬람교의 비율이 많을 뿐.
우리 숙소의 조식당에는 큰 원형 테이블 하나뿐인데
여기에서 새로운 투숙객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인 가족과 호주 가족이 떠나고 아이와 단 둘이 먹던 테이블에 오랜만에 북적북적해졌다.
자카르타 교수님은 정말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최근 발매된 APT. 얘기를 꺼내며 자기 떠나기 전에 그 게임 좀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오랜만에 숙소에 활기가 넘쳐나고 아침 식사 시간이
기다려졌다.
이거면, 충분한 걸까?
우리가 이 낯선 세계로 떠나온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