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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의 생각노트 Sep 14. 2022

매일 발전하고픈 너에게(1) - 처음부터 잘하려는 욕심

30대 늦깎이가 겪는 언어 진통 기록

일본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분명 6개월을 보낸 것 같은데 아직도 마트나 베이커리에서 '봉투가 필요하신 가요'라고 묻는 질문조차 잘 알아듣기 어렵고 부끄러워서 아무 대답 없이 신용카드를 먼저 내밀고 있다. 분명 20대 때만 해도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게 일본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남편이 대화 상대가 되어주기 위해 나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면 발가락이 제일 친한 친구인 마냥 바닥만 뚫어지게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 


1. 지난 노력 - 일본으로 떠나기 전 했던 노력

일본으로 떠나기 전 나는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가 많이 떨어졌었다. 공부만 하면 금방 배울 줄 알았다. 일본어 능력시험 초급 (JLPT N5)은 금방 따낼 수 있을 거라며 교제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정작 공부를 시작하니 칸지(한자)를 모르는 나에게 일본어는 흰 종이에 쓰인 먹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헷갈리기는 하지만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제대로 외우는데 2주나 걸렸다. 남들은 며칠 만에 외우는 기본적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오랜 기간 외워야 했던 스스로에게 이미 지쳐 있었는데 칸지를 보니 더 낙담이었다. 매일 밤 흰 종이를 까만 볼펜으로 칸지를 가득 채워가며 모르는 단어를 외워보았지만 다음날이 되어서는 하얗게 잊어버리는 나의 기억력도 원망스러웠다. 낙담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에 있는 일본어 교재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이 공부한다는 개념에서 시작이 되어서 한자를 배우지 못한 나에게 어려운 걸 꺼야'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며 일본어에 대한 마음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2. 합리화하며 보낸 지난 6개월

일본에서도 재택근무를 하니 일본어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컴퓨터로는 번역기를 돌리면 되었고, 주말에는 남편이 나 대신 말을 해주니 삶을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와중 나와 남편은 코로나에 걸렸다. 남편과는 다른 코로나 후유증에 시달렸던 나는 병원을 가기 위해 영어/일본어가 가능한 이비인후과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나의 증상을 대충 듣더니 코로나 증세처럼 보이기 때문에 해당 병원에서는 진찰이 불가능하다며 도쿄도에서 지정한 코로나 병원에 가라며 내원을 거절했다. 


또 한 번은 갑자기 이가 너무 아파 치과를 가야 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영어/일본어가 되는 치과를 찾아갔는데 이가 심각한 상태니 다 갈아엎어야 한다며 한화로 5천만 원 상당의 진단을 내렸다. 남편과 논의하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상의해보니 그 가격이면 한번 한국에 치과 의사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려 조만간 한국에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어만 조금 했었으면 이런 일이 있었을 때 아무런 걱정 없이 도에서 지정된 병원으로 바로 갔었을 것이고, 다른 치과들을 방문해서 진료를 받아보았을 텐데 일본어로 나의 정확한 상태를 진단받기엔 역시나 무리였다.


이렇게 나를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 게 일본어 같아서 미련하게도 나는 일본어도 일본도 미워졌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 배워도 된다는 핑계로 그만하고 싶었다. 웬만한 소통은 영어로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굳이 왜 일본어를 배워야 하냐며 스스로 합리화하며 지난 6개월을 보냈다.


3. 현실과 마주하다

현실은 혹독했다. 집에 날아오는 고지서나 공문은 당연히 일본어고 아직도 일본 사람들에게 영어란 쉽지 않다. 한국과 달리 웬만한 식당은 전화로 예약을 해야 하기에 기본 전화 일본어는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의 일본어 실력으로는 턱도 없다. 나의 직장 상사는 내가 일본에 있고 본인이 한국과 일본 사이를 자주 교류하니 일본어를 공부해라고 했지만 다시 책장에 꽂힌 두꺼운 문법 책을 꺼내기가 죽기만큼 싫었다. 


4.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되다

그렇게 6개월을 자기 합리화의 시간으로 보내고 다시 한국에 다녀 올 일이 생겼다. 한국에서 만난 세명의 치과의사(동네, 유명한 양심 치과, 그리고 대학병원 치과 교수님)들은 다 동일하게 '무슨 소리냐. 이는 잘 관리가 되어있다'며 그 외의 문제가 무엇인지 지적해주었고, 그것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후유증 치료가 더 시급했다. 후유증으로 인한 알레르기성 천식 증상과 탈수 증상 때문에 병원에서 자주 링거를 맞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내가 잘하는 언어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캐나다라는 타지에서 이민 생활하며 고생했을 엄마 아빠가 그제야 더 이해가 되니 눈물이 났다. 이게 진짜 이민의 현실이었고, 이민생활은, 특히 언어가 안될 경우,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는 시간이었다.


5. 자존심을 버리고 현실을 마주하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가 챙겨준 몇 가지 반찬거리를 정리하며 나의 위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나는 일본에 살고 있고, 일본어를 배우지 않으면 제한된 삶을 살수 밖에 없다. 이제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책을 펴고 자리에 앉았다.


6. 기존의 방법에서 조금 다른 방법으로 공부하다

똑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같은 결과만 나온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조금 다른 문제 해결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1) 인스타그램을 일본어 공부 피드로 가득 채우다

내가 매일 노출되고 있는 환경을 일본어로 바꾸는 게 시급했다. 매일 확인하는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일본어 선생님들로 가득 채워 그분들이 올린 단어나 문법에 노출될 수 있게 계속 팔로우를 했다. 그중 괜찮은 선생님을 찾아 1:1 온라인 레슨을 한번 신청했었던 적도 있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지속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좋은 선생님을 만났지만 시간당 5만 원씩 매주 두 번씩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일정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시작하지를 못했다.

내가 도움받고 있는 인스타 피드들 (이중 브런치 작가 '창빈'님의 인스타그램도 있다)

(2) 일기를 쓰다

이번에 문법책을 보면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했지만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루한 문법 공부를 조금 더 나에게 맞게 문법책에서 나온 딱딱한 예제와 단어를 다 외워야 한다는 압박보다 책에 있는 단어와 문법을 이용해 짧은 일기를 써보았다. 그렇게 매일 4줄씩 스스로 써보면서, 써보고 싶은 문장이 있을 땐 구글 번역기를 돌려 구글이 알려주는 대로 써보았다. 중간중간 이해 안 되는 단어나 문법은 문법책과 사전을 옆에 두고 이해가 될 때까지 붙들었다. 그렇게 쓴 문장을 남편에게 밤에 검사를 받고 나면 그 문장을 통으로 외워버렸다. 조금은 무식하지만 나에게 맞는 공부 방법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3) 영상 일기를 쓰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나고 나니 통으로 외우는 것은 좋은데 정작 남편이랑 말하려고 보니 외웠던 문장들이 쉽게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질문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일방적으로 외운 문장만 계속 얘기하는 바람에 지난 한 주간의 노력도 큰 발전이었지만 또 다른 변형이 필요했다. 글로 써서 외우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소리를 내서 연습하는 아웃풋이 인풋과 함께 같이 가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일본에서 찍어만 놓고 활용하지 못한 영상들이 떠올랐다. 일본 풍경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는 싶어서 찍기는 찍었는데 어떻게 스토리 텔링을 해야 하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냥 묵혀만 두었던 영상들을 다시 꺼내어 보았다. 영상을 보다 보니 어떻게 이쁘게 만들지 고민하는 것보다 어린아이의 일기처럼 글을 쓰고 그 위에 맞는 영상을 넣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어와 영어 자막을 넣으면서 일본어 작문 연습을 하고, 목소리로 자막을 소리 내서 읽어 더빙을 하면 좋은 인풋과 아웃풋의 연습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실행했다. 


하고 싶은 말을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써보고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았다. 구글 번역기에서 나온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문법책을 왔다 갔다 해보고, 기본적인 문법 문맥에 맞게 최대한 문장을 간단하게 만들어보았다. 그리고 노트에 그 문장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썼다. 모르는 단어도 써보고, 그 단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찾아보았다. 틀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최대한 연습을 많이 하고 이 과정을 통해 오히려 질문이 많이 생길 바랬다. 질문이 있으면 남편을 붙들고서라도 질문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스크립트가 완성되면, 일하다가도 쉬는 시간을 가질 때마다 스크립트를 몇 번이나 읽었다. 최대한  모든 문장을 외우려 노력했고 입에 붙지 않는 인토네이션은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최대한 원어민처럼 내보려고 했다. 그렇게 나의 첫 영상 일기가 완성이 되었다 (아래 영상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o0eMt7JWRro

첫 번째 영상일기


6. 결과

결과를 도출해 내기에는 아직 12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름의 단기간의 결과를 써보면 이렇다:


a) 일본어와 직결된 결과

* 만들어본 문장과 외운 몇 가지 단어로 남편한테 말을 조금 더 쉽게 꺼낸다.

* 구글 번역기를 돌리기 전에 스스로 해보는 작문의 정확도가 높아졌다.

*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일본어 회화를 켜놓고 모르는 문장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단어를 찾아 듣는 즐거움이 생겼다.


b) 그 외의 결과

* 영상을 본 사람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어 일본어 공부를 보다 열심히 할 동기가 생겼다.

* 좋아하는 영상 연습을 할 수 있어 덤으로 즐겁다.

* 19명에서 25명으로 구독자가 증가했다.

* 한 번에 잘할 수는 없지만 매일 조금씩 하는 즐거움을 배워가고 있다.

* 그리고 한주가 지난 지금 또 두 번째 영상 일기를 올리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Obx4LQOrqg

 

원어민처럼 빠르게 일본어를 배우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스스로가 발전하는 작은 과정들을 기록하는 것 또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시 나와 같이 필요에 의해 일본어를 공부해야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함께 소통하면서 서로 응원하면 좋겠다.


그럼 화이팅!


20220914

도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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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파머스 마켓이 어떤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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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돈카스 장인 맛집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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