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작은 거인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지난 18일(현지시간) 8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 등 정치적 거물들이 차례로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녀의 죽음에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조의를 표하는 이유는 여성 인권을 신장시킨 그의 입지전적인 업적 때문일 것입니다. 말년에 그녀는 '노토리어스 RBG'라는 별명으로 젊은 여성과 진보 지식인의 상징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보수로 기울어진 대법원 판결에 대해 비판 의견을 내며 주류 의견에 반기를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미국사회를, 세계를 조금 발전시킨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긴즈버그는 1933년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56년에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입학생 540명 가운데 여성은 긴즈버그를 포함해 9명뿐이었습니다. 당시 성차별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습니다. 긴즈버그는 당시 총장으로부터 "왜 남자가 할 일을 빼앗으려고 하느냐"고 핀잔을 들을 정도였죠. 로스쿨을 졸업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 로펌에 입사 서류를 넣었지만 전부 탈락하고 말죠. 이유는 같았습니다. "우리 회사는 여자를 뽑지 않는다"였죠.
그의 긴 여정을 성공으로 이끈 데에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만난 남편의 역할도 컸습니다. 남편도 뉴욕에서 저명한 세무 관련 변호사였지만, 그를 대법관에 지명시키기 위해 각계각층을 만나며 그녀를 홍보하죠. 이후 긴즈버그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대법관으로 지명받자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그녀를 따라옵니다. 아이들에게는 '요리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자녀들은 긴즈버그의 요리 솜씨는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여성 인권 변호사로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사건은 교수 시절 처음 맡은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사건입니다. 공군에 입대한 여성 소위 '프론티에로' 성별을 이유로 남성이 받는 주택수당을 받지 못해 대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긴즈버그는 당시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라는 1837년 노예제 폐지론자이고 양성 평등 지지자인 ‘세라 그림케’의 어록을 인용하며 변론을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녀의 승리 전략은 흑인 인권운동과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니("All Men Are Created Equal" ) 흑인과 백인의 차이를 둘 수 없는 것과 같이 여성과 남성도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당시는 막 흑인 인권운동이 막을 내리고 여성운동으로 대체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녀는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여성 운동의 대부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녀는 선동가는 아니었습니다. 아주 차분하고 논리적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어본 적이 없죠. 그녀의 어머니의 가르침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첫째, 숙녀가 돼라, 둘째, 독립적이게 되라는 것을 강조했죠.
여성 관련 소송을 줄줄이 연승한 그녀는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1980년 첫 연방 항소법원 판사로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미국 대 버지니아 군사학교(한국의 육군사관학교) 판결을 맡게 됩니다. 버지니아 군사학교는 150년 동안 줄곧 여성 생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학생을 기준으로 한 신체 기준을 충족하며 생도 과정을 이수할 능력이 있는, 여학생은 입학을 희망해도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 판결문을 근거로 여성의 동등한 기회를 제한하는 법률의 효력은 소멸할 것이며 여성의 뜻과 성취와 참여는 제한될 수 없고 여성도 능력에 근거해 사회에 기여할 것이다"라는 판결문을 낭독하며 여성에게 기회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듬해인 1997년부터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여성 생도가 입학하게 되고 남성과 함께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보수적인 대법관과도 교우 관계가 두터웠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앤서니 스캘리아 대법관은 헌법을 적혀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수주의자입니다. 이념적으로 둘은 극과 극이었지만 그녀와 그의 우정은 완벽했습니다. 그녀는 앤서니 스캘리아 대법관이 별세했을 때 그와의 추억을 곱씹으면서 "앤서니 대법관은 나에게 가끔 가장 좋은 사람이 가장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미국 대법원은 좀 더 오른쪽으로 가게 됩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대법관 두 명을 연달아 지명하게 되면서죠. 이때부터 그녀는 '반대자'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그녀의 성향은 중도 진보 정도였지만, 보수 우파 대법관이 들어오면서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임금 차별에 대해 기업의 손을 들어준 '래드베터 대 굿이어' 등에 반대의견을 내놓으면서 '노토리어스 RBG'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는 "대법원은 몰이해하거나 무관심한 모양이다. 여성 직원에게 교활한 임금 차별이 자행됐으나 법원은 고용 행태를 규율하는 법률과 사업장의 현실을 외면했다. 남자 동료의 급여 명세를 처음부터 알 수 없다. 상당 시간을 근무한 뒤에야 차별을 의심할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오늘 공은 또다시 의회로 넘어갔다. 대법원이 빠진 오류를 의회가 바로잡아야 한다."고 의회를 압박했고, 이는 '릴리 레드베터 페어 페이'(Fair Pay)라는 법안으로 탄생했다. 성별이나 인종, 종교, 나이, 장애 등의 이유로 임금을 차별받은 근로자들의 법적 소송을 용이하게 만드는 게 법률의 골자다.
그녀의 여정은 끝났지만, 이제 남은 사람들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그녀는 헌법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게 될 미래의 모습을 그려줬습니다. 남녀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세상, 인종이나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법 앞에 평등한 세상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헌법의 가치 아래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