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3부작 - (3)
본격 프리랜서 시대를 개막한 한 여자의 삶이 뮤직복싱의 에너지와 맞닿았을 때 일어난 시너지 효과와 사건들. 그로인해 다시 쓰는 삶의 우선 순위에 대하여.
“거기 복싱 댄스하는 데죠?” “아… 여긴 뮤직 복싱하는 뎁니다만….” 오, 이런, 첫 통화부터 실언을!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독립한 시점, 출퇴근할 필요가 없어진 나는 오랫동안 지속한 회색빛 ‘강남 시대’를 접고 강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실을 홈 오피스로 삼았더니 침실 문만 열면 자동 출근, 침대를 기준으로 거실 의자까지 ‘3m 출근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지난 안식년 동안 다져놓은 아침형 인간의 삶의 루틴을 새 공간에 대입하기 시작한 내 홈 오피스 라이프는 처음엔 (누구나 그렇듯) 무리 없이 진행됐다. 그러나 곧…. 루틴이야 그렇다 쳐도 출퇴근하지 않다 보니 턱없이 부족한 운동량이 문제였다. 가끔 갔던 한강고수부지 산책마저 그림의 떡이 된 시간들이 도래하자, 다급한 마음으로 인근 스포츠센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기준은 딱 한 가지. 불필요하게 쌓아둔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태울 수 있는 운동일 것! 그렇게 몸을 혹사시킬 요량으로 선택한 것이 ‘뮤직 복싱’이었다.
어쩌면 에어로빅과 비슷한 운동일 것 같다고 생각했던 내 긍정적 심증은 회원 등록을 위해 들른 복싱장의 마룻바닥을 내딛는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내가 왜 뮤직 복싱에서 에어로빅의 긍정성을 느꼈는가 하면 첫째는 에너지 소비가 많은 전신운동일 것 같아서, 둘째는 그런 와중에 일종의 멋스러운 동작을 연마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셋째는 커다란 음악 속에서 세상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넷째는 이 모든 점을 아울러 청춘의 활력을 돌이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 아예 에어로빅을 하지 왜 뮤직 복싱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직은 좀 덜 아줌마스러운 운동을 하고 싶어서’ 정도로 대답할 수 있으려나(집 근처에 에어로빅을 하는 곳이 없기도 했고). “에어로빅적인 요소가 강하죠. 고강도 유산소운동인 보디 컴뱃(Body Combat)과도 비슷한데, 보디 컴뱃이 무술 동작이라면 뮤직 복싱은 복싱의 동작과 요소를 넣어 프로그램을 짰다고 보시면 돼요. 조혜련 씨가 했던 태보를 떠올려도 되고요. 체육관마다 스타일이 조금씩 다른데 우리 체육관은 좀 ‘빡센’ 편이죠.” 관장님과 더 이상의 상담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블로그에서 프로그램 동영상을 여러 번 봐왔고 ‘빡센 프로그램’이라는 혹사의 조건을 갖췄음을 확인했으니 합격!
2년 전 회사를 떠난 후 나는 1년 동안 ‘일단 멈춤’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개인의 삶을 시작했고 그 시간을 ‘좋은 습관을 만드는 일’에 투자했다. 내게 좋은 습관을 만드는 일은 삶의 일정한 리듬을 타는 일에 가까웠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라는, 이방인이 살기에 녹록하지 않았던 도시에서 매일 외로운 싸움을 하는 복서의 심정으로 사는 동안 나름의 리듬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전진할 때도, 후퇴할 때도 분명 끊임없이 낮은 스텝을 밟고 있었던 나는 삶의 탄성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서울로 돌아와 익숙한 곳에 닻을 내리자 그 리듬감은 이내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마 초보 프리랜서의 삶이 빚어낸 강한 ‘엇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복서 같던 추진력도 수그러드는 듯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비우고 체력을 길러 삶의 추진력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다. 쉬는 시간은 끝났고,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도래했기 때문에.
다행히 현실에서 만난 복싱은 열린 스포츠였고 비교적 접근하기 쉬웠다. “따라 해보실까요? 잽잽 투 투 원 투, 훅훅 훅훅 원 투.” 코치의 맨투맨 레슨을 받을 때, 이 정도 수준이면 그룹에 들어가서도 금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순간 “잽잽 투 투 스위치 두 번 원 투, 훅훅 다운위빙 두 번 원 투, 쓱 네 번 스위치 네 번 롤링 두 번 다운 두 번 위빙 찍고 오른쪽 찍고 왼쪽” 같은 외계어들이 어려운 스텝과 함께 이어졌다. 3주가 지나자 잽, 원 투, 훅, 어퍼, 쓱빡, 더킹, 위빙의 일곱 가지 동작과 스위치, 백 스텝 등 발동작을 가미한 거의 모든 콤비네이션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뒤꿈치를 치켜든 내 발은 45분 내내 낮게 점프하며 동작을 이어갔고, 15분간의 그룹 PT를 통해 나태해진 근육들은 ‘악’ 소리를 쏟아냈다. 일반적으로 50kg의 여성이 10분간 운동할 때 요가는 22kcal, 달리기는 61kcal, 수영은 79kcal를 소비하는 반면 복싱은 무려 88kcal의 지방을 태운다. 강도 높게 진행할 땐 최대 80% 이상의 심박수를 보이며 다이어트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심폐 지구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다시 마라톤에 도전하게 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운동에 중독성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땀’이 주는 희열 때문이다. 땀과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한 정보가 많은데, 내 경우엔 온몸을 적시는 땀의 분비 자체가 엔도르핀 효과를 일으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운동 후 샤워를 끝낸 날이면 그날 일정과 관계없이 ‘오늘 하루, 정말 알차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기분이 든다. 복근, 등, 팔, 하체 등을 단련하는 근력운동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근육이라는 녀석이 과연 내 몸에서 두각을 나타낼까 싶은 의문은 여전하지만 겨우 30초만 버티던 플랭크 자세를 1분 30초까지 유지하게 됐을 때 혹은 30회 하던 윗몸일으키기를 60회까지 채울 수 있었을 때의 성취감 역시 복싱장으로 향하는 즐거움 중 하나다.
가끔 ‘돈 내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체력을 모두 소진한 날에는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내 사소한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에 기쁨을 느낀다. 스스로 대견스럽다. 처음 기대한 대로 에너지 소비가 많은 전신운동, 멋스러운 동작을 연마할 수 있는 스포츠임은 물론, 음악 속에서 잡생각 없이 청춘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내게 주어진 아주 작은 일(혹은 기회)을 열심히 했을 때 비로소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고, 더불어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다. 그러므로 하루 약 400kcal를 소진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일은 삶에 주문을 거는 행위이기도 하다. 운동 후 초콜릿 바 하나를 입 안에 털어넣으며 어렵게 소진한 칼로리를 금세 재충전(!)하는 날도 있지만, 그 또한 운동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고백하자면, 나는 지난 6개월간 뮤직 복싱을 통해 단 1kg의 감량도 한 적 없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결과이니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주변 사람 중엔 놀라운 다이어트 효과를 본 사람이 적지 않으니까. 다만 내 운동은 다이어트가 아닌 생활양식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지난해 서울로 돌아왔을 때, 마흔을 맞은 나는 가족과 지인에게 아직 내 명의의 집이 없다는 이유로 제법 많은 공격(!)을 받았다. 애정 섞인 야유치고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시금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빚을 지고서라도 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부동산 채널을 돌려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내 삶을 아름답게 하기보다 황폐하게 만들 뿐인 무익한 유혹에 맞서 자신을 지킬 때 풍성한 삶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상기했다(물론 투자금도 없을뿐더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쓴 귀족 집안 출신의 프리랜스 기자 알렉산더 푄 쇤부르크는 책을 통해 “인간은 실제로 돈이 없어도, 아니면 아주 적은 돈으로도 얼마든지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생활양식”이라고 했다. 나는 우선 우아하게 가난해지기 위한 우선순위를 정했다. 거기엔 오르지 못할 나무를 목 빠지게 올려다보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그 에너지를 무턱대고 소비에 탐닉하는 자세를 교정하는 일, 가난할 때 비로소 명민해지는 가치에 집중하는 일, 필요 이상의 노동에 휩쓸리지 않는 일, 기분 좋은 움직임을 통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일에 적절히 사용할 계획이다. 선배 프리랜서들이 경험했다는 비정규직의 불안감을 다르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과제도 있다. 다행히 여유를 부리는 능력과 유희적으로 일을 즐기는 성향을 적당히 타고났으니 시행착오를 통해 나름의 답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나에겐 힘든 날에 참여할 뮤직 복싱 클래스라는 스트레스 해소 창구도 있다. 실컷 땀을 뺀 후 마룻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을 때마다 찾아오는 무작정한 휴식이 모이면 또 그날의 내일을 계획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