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xpected Discovery
라스베이거스가 이렇게 건강한 곳인 줄 알았다면 내 진작 들를 걸 그랬다.
여행 스타일은 유연하지만 여행지 취향은 확고한 편. 때문에 그간 북미대륙과 그리 친해지지 못했다. LA는 비버리힐즈에서의 화보 촬영을 위해, 하와이는 태곳적 자연 속에서의 화보 촬영을 위해, 마이애미는 디자인페어 취재를 위해... 일로만 엮인 악연(?)도 한 몫 했다. 라스베이거스에 간다면 그 또한 거친 사막에서의 화보 촬영을 위해서였을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북미대륙, 그것도 별천지 라스 베이거스에서 ‘건강’이란 여행의 선택지를 내게 건넸다. 덥썩,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눈앞엔 제법 뜨거운 태양과 드넓은 사막, 푸른 하늘이 그야말로 그림같이 펼쳐져 있었고, 등 뒤엔 ‘매버릭 헬리콥터스(Maverick Helicopters)’라고 쓰인 7인승 헬리콥터가 착륙해 있었다. 그곳이 ‘불의 계곡(Valley of Fire)’이라 불리는, 아찔하게 높은 바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헬리콥터가 서 있는 풍경이 얼마나 기묘한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건 내 삐걱거리는 몸이 요가 강사 드레이 가드너(Dray Gardner)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노팅힐 O.S.T ‘Ain’t No Sunshine’, 퀸의 ’Bohemian Rhapsody’ 같은 음악이 내가 사랑해 마지않은 플레이리스트여서 몸 상태가 극적으로 끌어올려진 것은 아니었다. 굽이굽이 솟아오른 바위에 두 발을 딛고, 계곡이 뿜어내는 공기를 음미하며, 사막이 잉태한 풀숲을 지켜보며 치른 ‘의식’ 덕분이라 생각된다. 때문에 문득 ‘힐링’이라는 단어를 그동안 제대로 사용해 왔는가 하는 자문마저 들었다. 운동 후 마신 차가운 드미섹 샴페인 맛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불의 계곡에서 치러진 헬리 요가는 ‘인생 여행 코스 베스트 10’ 속으로 날아들었다. 풍경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여행의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으므로. 요가 클래스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돌고래와 사자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미라지 호텔의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 and Dolphin Habitat)에서 ‘돌고래와 요가하기’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이 강좌는 돌고래와 ‘함께’라기보다 돌고래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수족관과 창이 맞닿은 아담한 방에서 진행되는 1시간 동안 호기심 많은 돌고래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뭔가 뒤바뀐 듯한 상황에서 그들은 인간들이 묘기를 펼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재주 부리는 곰이 되는 게 그렇게 기분좋은 일인지 처음 알았다. 요가 후에 방문한 윈 스파(The Spa at Wynn)의 사우나와 마사지 코스는 불의 계곡에서 즐긴 샴페인과는 다른 맛, 다른 호사였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호텔 중 처음으로 포브스 트레블 가이드 파이브 스타 어워드(Forbes Travel Guide Five-Star Award)에 오른 스파답게 이국적인 인테리어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물론 내게 배정된 에스테티션의 여문 손끝으로만 비교하자면 내 오랜 원장님이 갑이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다. ‘근육이라는 것도 살아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힘 안 들이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심하고 기억을 지워 나간다’고. 수개월간 한강 근처도 나가지 않은 내 근육들도 차근차근 움직임을 망각해 가는 중이었다. 매년 11월경에 치러지는 로큰롤 마라톤 참가가 여행의 주목적인데도 겨우 ‘5km’만 신청한 이유였다. 예상대로 5km는 이 대회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메인 대회 하루 전, 반만 통제된 거리에서 도심을 에두른 거리에는 여인과 노인, 가족 단위의 참가자가 자주 눈에 띄었다. 경기 하루 전에 컨벤션 센터로 등 번호를 받으러 갔을 때, 수많은 스포츠와 건강 관련 브랜드 부스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젤리구미 모양의 비타민과 아미노산 음료 등을 차례로 맛보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바로 네일 아트 부스. 손톱 정리가 시급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무료 네일 서비스를 받으면서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네일 브랜드가 여기 왜 있어?” “우리? 요 옆엔 젤리빈 가게도 있던데 뭐! 하하.” 다음 날, 패션에 신경 쓰는 것 이상으로 유명인이나 인기 캐릭터 코스프레를 즐기던 대회 참가자들을 보면서 비로소 네일 브랜드가 왜 스포츠 행사에 참여했는지 알게 됐다. 그 속엔 유독 #VegasStrong(라스베이거스는 강하다)이란 레터링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많았다.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안타까운 사고를 겪은 이곳 시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 역시 같은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달리다 보니 5km 코스라 해서 꼭 걷거나 ‘살살’ 뛰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어서 천천히 속도를 올린 나는 마지막 1km가량은 전력 질주했다. 달리기 대회니까 아무래도 러너답게 결승점에 골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경기를 마치고 나니 무대에선 록 밴드 구 구 돌스(Goo Goo Dolls)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잔디밭에서 어릴 적 자주 듣던 ‘Iris’에 맞춰 쿨다운을 하고 땀을 식히는 시간도 상쾌했다. 대회 참가를 원한다면 최소 10km를 권하고 싶다.
호사의 범주에 미식을 빼놓을 수 없듯 라스베이거스의 외식 문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지역 농산물과 신선도 높은 해산물로 만든 착한 메뉴를 찾아다녔다. 제일 먼저 반해버린 레스토랑은 얼음 쇼케이스 위에 싱싱한 해산물을 전시해 놓은 코스모폴리탄 호텔의 에스티아토리오 밀로스(Estiatorio Milos). 시각적 즐거움뿐 아니라 재료의 힘이 느껴지는 그리스 요리의 향연에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애피타이저로 각종 야채튀김(밀로스 스페셜)과 그릭 샐러드를, 두 번째 코스로 문어 요리와 버섯, 파프리카 구이를, 세 번째 코스로 농어소금구이와 로브스터 스파게티, 양고기 구이를, 디저트로 그리스 스타일의 건강한 디저트들을 맛봤다. 정말 많이도 먹었다. 이처럼 다채로운 메뉴를 혀끝으로 보듬는 덴 와인 페어링의 공도 컸다. 지금도 생각나는 이름 중 하나는 스키퍼(Skipper), 이곳에 들른다면 신선한 보디감으로 해산물과 잘 어울리는 그리스 와인으로 테이블 매니저에게 추천받을 것을 권한다. 분수 쇼로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의 하비스트 바이 로이 엘라마르(Harvest by Roy Ellamar)는 ‘팜 투 테이블’을 지향하는 레스토랑답게 라스베이거스 근교에서 재배한 식재료를 헬리콥터로 공수해 신선도를 살려 요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메뉴 구분도 가든(Garden), 오션(Ocean), 랜드(Land) 등 재료 출처 위주로 구성돼 있다. 봄베이 진 베이스의 칵테일 ‘팜 더 가든(Farm the Garden)’을 시작으로 맛본 생굴과 하비스트 특제 샐러드, 피시맨 스튜, 로스트 치킨 등은 재료를 음미하게 만든 담백함이 인상적이었고, 골고루 주문해 멤버들과 나눠먹은 디저트들은 하나같이 플레이팅이 예술이었다. 이 밖에 세비체, 과카몰리 샐러드 등 남미 음식에 빠져들었던 베네시언 호텔의 치카(Chica), 미국 남서부 스타일의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아리아 호텔의 헤링본(Herringbone)도 빼놓을 수 없는 리스트다. 고기를 멀리하는 내 식단과는 잘 맞진 않지만 감탄할 수준의 맛이었음은 인정하고도 남는 ‘장 조지 스테이크 하우스’의 고베 비프 스테이크도 잊을 수 없다. 라스베이거스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플로리스트 제나 제임스가 라스베이거스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내게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거긴 정말 크레이지한 곳이지만, 크레이지한 이면도 있어.” 그렇다면 내가 경험한 이 여행은 라스베이거스의 크레이지한 면이었을까 아니면 크레이지한 이면이었을까. 그곳은 꿈과 향락의 도시가 분명하다. 다만, 우리의 선택이 여행의 얼굴을 바꾼다. 라스베이거스에도 그런 선택지가 충분했다. 어떤 경험을 할지, 선택의 몫은 앞으로도 내내 나와 당신에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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