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인잠 Aug 19. 2020

세상에서 가장 이해심 많은 할머니를 만나고 온 날

중 1 딸아이가 학교에 다녀와서 내게 말했다.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지 않고는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아서' 2개를 사 먹었다고 말이다.

그러다 오는 길에 굉장히 이해심 많은 할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궁금했다. 어떤 할머니이기에 이해심이 많다고 느꼈을까. 버스 정류장에 앉았던 그 길지 않은 순간에!


할머니께서는 아이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시켜보셨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말 끝에 이렇게 말하셨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 공부하는 게 가장 어려웠어. 애들한테는 공부가 제일 힘든 거여.

애나 어른이나 사는 게 힘든 건 똑같아.'


!

아이는 그 말이, 자기의 어려움과 힘든 마음을 이해해주는 말로 느꼈나 보다. 그래서 할머니를 가리켜 '아주 이해심이 많은 할머니'라고 내게 소개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이에게 미안한 점이 생겼다.

단순히,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요는 커녕 내버려 둔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스트레스를 주건 안주건, 아이가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영역이 있음이 이제사 돌아봐지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찾아서 하는 아이는 지금도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고, 올해 첫 입학한 중학교 1학년 1학기 학력평가에서 담임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아이가 스스로 학습하고 기록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는 글이 있었다.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아이에게 공부에 대해 강요하지 않고, 아이도 나에게 공부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진 않지만, 아이가 느끼고 있을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나 어른이나 사는 게 힘든 건 마찬가지라는 할머니의 말을, 어릴 때 공부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는 할머니의 말을 마음에 담고 집에 온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어른은 어른의 책임감과 노력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 과중하고, 아이는 그 작은 체력과 체격과 세상에 대해 다 알지 못하는(어른이 되어도 결코 다 알 수 없을) 막연함 속에서 느껴지는 과중함이 있을 것인데...


그래도 나는 믿는다.

공부도, 삶도, 꿈도, 미래도

힘들긴 힘들지만, 그 가운데 너무나 달콤한 꿀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행복을 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런 재미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내 아이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웃으며 '이해심 많은 할머니를 만나고 온 날'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이해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살아갈수록 느낀다. 어쩜 그렇게 다르고. 자기만의 생각이 확고하고 이해의 여지가 없는 대화는, 입장은, 관계는 얼마나 또 많은가.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질 때는 '이해하지 못함'으로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

이해를 못해서 일이 잘못되어갈 때가 있고, 이해해주지 않아서 서럽고 답답한 때는 얼마나 많은가.

내 아이를 이해해 주는 사람, 내 아이가 이해할 세계가 열려있다. 그 열린 문으로 환한 빛 같은 만남이 찾아오면 좋겠다.


환한 빛 같은 아이는 오늘도 집에 온 뒤 뭐가 그리 좋은지 그저 즐겁다.

얼마 전 친구와 오해로 멀어져 침울해 보이긴 했으나 멀어진 건지 받아들인 건지, 멀어짐을 받아들인 건지 편안해 보인다.

엄마인 내가 나의 아이를 많이 이해하고 보듬어주어야겠다. 세상에 나가서 부딪힐 벽 앞에서 되돌아와 안길 수 있는 넓은 품이 되기 위해서, 나도 이해심 많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 할머니의 조크도 배워야겠다.


'애나 어른이나 살기는 힘들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