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워킹맘이 빠진 완벽주의의 덫

by 지음


작년 한 해 동안 나의 특화된 상담 대상은 누구일까 고민했다. 지금까지는 수련생의 입장에서 성인, 청소년, 청년, 직장인, 목회자 등을 두루 상담해 왔다. 박사 과정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신의 전문화된 영역을 연구하고 특화하고자 함이다. 아주 길고 긴 고민 끝에 내가 주력하고 싶은 상담 대상은 "워킹맘"임을 깨달았다. 워킹맘은 내가 잘 아는 대상이었다. 바로 나 자신이 워킹맘으로 아주 오랫동안 고군분투 해왔기 때문이다.


출처: unsplash/ working mom

워킹맘 16년 차. 세월이 참 빠르다. 벌써 16년이라니.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아이를 가지게 됐다. 그 당시 직장 상사의 말도 안 되는 조언, "내가 계획하지 않고 낳은 아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같이 느껴진다"라는 말에 감동받았더니 하나님은 아들을 바로 선물로 주셨다. 그때는 왜 그리 빨리 응답하셨는지.


예정일 일주일 전까지 회사를 다녔고, 휴직 후 이틀 만에 첫아이가 선물처럼 태어났다. 그 당시엔 육아휴직이 지금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였기에 출산휴가 4개월이 끝나는 대로 복귀했다. 아이의 아토피가 심해 모유 수유를 끊기가 미안했던 나는 유축기를 회사에 들고 다녔다. 회사가 가까워 점심시간에는 아이에게 직접 수유를 하기 위해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회사로 갔다. 예민했던 아이는 밤잠을 잘 자지 않았다.그런 아이를 달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밤중수유였다. 하루 평균 7~8번씩 밤잠을 깨우며 밤중 수유를 계속하던 나날들이었다.


그럼에도 커리어를 놓을 수 없었고 육아에 무지했던 나는 그 와중에 놀라운 계획을 세웠다. '아이가 아직 아기일 때 내 커리어를 쌓자. 중국에 가서 중국어 공부를 하고 오면 중국 전문 변리사로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지고 일할 수 있을 거야.' 당시 재택근무라는 로망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기 위한 나름의 과감한 투자였다. 이 말도 안 되는 투자에 친정엄마와 남편은 기꺼이 동행해 주었다.


출처: unsplash / working mom

중국 유학 동안 오전에는 언어 연수, 오후에는 중국 로펌에서 업무 연수를 받았다. 그 당시에도 모유 수유를 끊지 못한 나는 젖이 불어있는 상태로 회사를 다녔다. 밤중 수유하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종종 젖몸살도 있었음에도 아이가 아토피로 고생할까 봐 나는 이 고생을 견뎌야 했다. 중고등학교 때 아토피로 고생했던 나였기 때문에 아들에게 아토피를 물려줄 수 없었다. 모유 수유를 하면 아토피로 고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합리적 신념을 투철하게 가지고 있었다(산후조리원에서 만난 세 아이의 엄마가 해준 얘기를 귀담아듣지만 않았어도 그러지 않았을 수도. 역시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좀비처럼 학교와 회사, 집을 오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고야 말았다. 회사에서 돌아오니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2살짜리 아들. 아들은 헐레벌떡 나에게 와서 안겼다. 우리 모자는 당연한 의식을 치르듯 소파에 앉았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나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손을 붙잡고 수유를 했다. 그때 아이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처음 보는 손짓을 했다. 무언가를 쥔 손 모양을 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이를 쳐다보던 나에게 친정엄마가 말했다.


"아이고, 내가 얘가 울 때마다 연필 잡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엄마 학교 갔어~ 엄마 일하러 갔어~ 그렇게 계속 가르쳤더니 엄마 일하고 왔냐고 물어보나 보다!"


"......"


지금은 중3을 바라보는 아들의 아기 때 모습을 이 장면으로 가장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것이 가슴 저리다. 그때 느낀 미안함과 죄책감은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한국에 돌아와 남편과 사무소를 개업한 이후에도 늘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는 절대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일이 더 많이 들어와도 아이와의 시간에 방해되는 일이라면 거절하기 일쑤였다. 한참 회사가 성장하는 시기였지만 나는 재택근무를 고수했다. 서투른 재택근무로 인해 결재 타이밍을 빈번히 놓쳤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어느 날 내가 가장 믿고 있던 직원이 정색하며 "변리사님, 회사에 좀 더 나오세요. 저희 엄마도 워킹맘이었는데 집에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저 잘 자랐잖아요. 회사에 계실 때랑 아닐 때랑 차이가 많이 나요." 회사가 정말 잘 되길 바라는 그 친구의 충언이었다. 회사를 생각하면 나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충언을 밀어냈다. 내 몸이 아이와 함께 한 공간에 잠시라도 더 있어 주는 게 중요했다. 아마도 중국에서 마음 아팠던 그날을 복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가정도, 일도 다 잘 해내고 싶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토록 고군분투한 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 같아 우울했다. 잠을 줄여가며 둘 다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내 능력이 부족해서 결국 나는 일도, 가정도 제대로 꾸려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작년 교수님께 교육 분석(상담)을 받으며 나는 어떤 함정에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중학생인 아들의 성적표에서 하나라도 90점 이상을 못 받는 과목이 있으면 정말 화가 난다고 했더니, 교수님은 느닷없이 내 얘기를 하셨다.


"선생님도 삶의 모든 분야에서 90점 이상을 받고 싶나 봐요. 일, 가정, 신앙, 재정... 아직도 고등학생인 것처럼요."


그렇긴 했다. 내 삶의 일부라도 90점 밑으로 가는 건 싫었다. 어떤 것이든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니까. 열심히 살다가도 나도 모르게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졌다. 그런 패턴에 대해 교수님은,


"90점대와 20점대를 반복하는 이유가 뭘까요. 20점대를 받는 건 다음 90점대를 받기 위한 선생님의 전략 아닌가요? 선생님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7,80점을 받는다는 걸 견디지 못하니까. '내가 안 해서 20점이지, 나는 하기만 하면 90점 이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니까'라고 자존감을 유지해 온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그런 식으로 하면 삶 전체에서는 평균적으로 7,80점도 넘기기 힘들다는 거."


비난이 아니었다. 그림자를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내 완벽주의 전략은 대부분 실패했다. 하기만 하면 90점대 이상은 너끈히 받는 나 자신만 남기고 싶었다. 그러니 안될 것 같으면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내 자존심을 유지했다. 그 전략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기에 반복되었다. 고질적으로. 하지만 나름의 성공이지 내가 바라는 성공이나 행복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나는 사랑하는 일을 할 때 없던 에너지도 끌어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꾸린 이 가정은 말로 표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 일과 가정 모두 잘 꾸려가고 싶다. 나만 그럴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워킹맘들 모두 그렇지 않을까. 나는 전략을 바꿔야 한다. 그 전략의 첫 번째 키는 내가 최선을 다해도 7,80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다. 두 번째 키는 그리고 내가 선택한 그 삶의 판에서 나가지 않고 견뎌내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에는 완벽주의의 함정에 빠진 워킹맘들이 많다. 충분히 잘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다시 채찍질한다. 자녀에게 늘 미안해하고 자녀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번아웃에 빠지고 우울해진다. 육아와 일 모두에서 자신감을 잃어가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다.


이제는 나에게도, 그녀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이미 당신은 충분하다고.

그러니 우리 함께 이 시간들을 견뎌내 보자고.

쉬어가도 다시 일할 수 있다고.

일하더라도 다시 애착을 회복할 수 있다고.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늘 기회는 있다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