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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09. 2018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무효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하비 콕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강의하였던 하비 콕스(Harvey Cox, 1929~)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을 통합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기독교의 복음이 믿는 사람 사이에서도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을 그리스도인 스스로 확실히 증명하였기에 더는 손쓸 방법이 없다고 한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용어들을 생각 없이 사용할 때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단어가 ‘복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게 좋은 소식을 복음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영어에서 복음은 good news(gosple, 좋은 소식)이다. 좋은 소식은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무엇일까요?’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자기 능력도 모르고 아이돌 되겠다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어깨에는 나비 문신하고, 제멋에 취하여 살던 딸이 어느 날 정말 유명 기획사에 스카우트되어 TV에 출연하게 되면, 좋은 소식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문을 이곳저곳 두드리다 마침내 중견기업에 취업하게 되면, 좋은 소식일까? 나이 40이 다 되었는데 결혼을 꿈도 안 꾸던 아들이 어느 날 어여쁜 처녀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좋은 소식일까? 가슴에 사표를 품고 다니며 날마다 짜등거리던 남편이 어느 날 회사에서 진급하여 싱글벙글 들어오면, 좋은 소식일까? 명퇴하고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남편이 조그마한 기업에 재취업하면, 좋은 소식일까? 아무 생각 없이 종합 진단받았는데 덜커덕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하던 아내가 완치되어 건강을 회복하면, 좋은 소식일까?


좋은 소식은 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소식(복음)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에 빠진 나를 구원하여 주었다는 소식이다. 죽음 가운데 소망 없이 살아오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정말 좋은 소식일까?


로이드존스 목사는 복음이 우리에게 정말 좋은 소식이냐고 질문한다. 복음을 들을 때 정말 기쁘고 감격하며 흥분하고 있느냐고 질문한다.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기뻐하느냐고 질문한다. 복음을 모르면,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기쁨이나 감격은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믿는다 하는 우리가 아무런 감동이 없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이 복음으로 감격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복음에 대해서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복음을 선포하였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이해한 복음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복음은 신약에 와서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미 선포되었다.


구약에서는 복음(좋은 소식)은 종교적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쓰인 적이 여러 번 있다. 이스라엘이 수리아에 포위당하여 굶어 죽어갈 때 몇 명의 나환자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수리아 진영으로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수리아 군은 음식과 무기를 그대로 두고 밤새 도망쳤다. 횡재를 만난 나환자들은 배불리 먹은 후, 반성한다. 풍성한 음식이 여기 있는데 굶어 죽어가는 백성에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구약에서 좋은 소식은 새로운 왕의 등극, 또는 적군에게 승리, 왕자의 출생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왕상1:42, 삼상31:9, 시68:11-12) 이사야 선지자는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이 귀환할 것을 예고하며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이 드러날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1)


구약 이야기는 그저 한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소원이 성취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온 세상에 드러나면서 하나님 나라가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구약 이스라엘은 약소국으로 언제나 외적의 공격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더욱이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리지 않고 제 배만 불리니, 백성은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꿈꾸는 천국은 소박하였다. 내 손으로 농사지은 것을 누구에게 빼앗기지 않고 마음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구약 백성의 삶은 고달프고 눈물 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때 좋은 소식은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회복다는 소식이다.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며 행복하게 지내는 나라를 말한다. 그 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모든 문제에서 고통받을 일이 없다. 그 나라 백성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나라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외친 첫 마디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다. 고향 땅 나사렛에 들르셔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어주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7-19) 그리고 사람들을 한동안 쳐다보시더니 한 말씀 더 하셨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 구약 선지자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던 하나님 나라가 이제 이루어졌다는 선포는 로마의 압제와 욕심으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의 착취에 신음하던 유대 백성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이 온 세상에 드러나면서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서 온갖 설움과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요 행복의 나라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개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나 한 사람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하면, 그것은 너무 작고 좁게 해석한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다. 그것은 개인을 뛰어넘어 공동체로 그리고 나아가 온 우주를 구속하시는 하나님 나라로 확장하여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주적이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복음을 개인에게만 적용하였다. 개인 구원, 개인 신앙생활, 개인 신앙 윤리 등 모두 개인에게만 적용하는 데 집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개인을 뛰어넘어 우리 신앙 공동체의 윤리와 성화와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개인의 신앙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의 신앙과 윤리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기독교의 공공성, 기독교 공동체의 윤리, 기독교 공동체의 헌신은 생각하지 않고, 교인들만 나무라고 교훈하는 모습은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복음은 신음하는 백성 한 명 한 명에게 좋은 소식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공동체를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고, 나아가 허무한 데 굴복하여 신음하는 피조 세계 전체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상 모두를 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는 일이 아니라, 저들을 위하여 눈물 흘려 기도하고, 사랑으로 품어주면서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능력을 나타낼 때 복음이 복음된다.


주 1) 르네 빠딜라,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문장 옮김 (대장간;대전) 2012년. 위의 글은 이 책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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