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유대인에게 하나님 나라는 낯선 말이 아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만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기 욕심만 차리고 백성을 돌보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그들을 책망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정의로운 나라를 선포하였다. (사9:7, 렘23:5, 33:15, 슥8:8) 결국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고 헬라와 로마에 유린당하자, 유대 백성은 하나님께서 정의롭고 공평하게 다스리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러나 덧없이 세월만 흘러가고 소망은 점점 헛된 망상처럼 바뀌어져갔다.
유대인 말고 헬라 사람이나 이방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알아들었을까?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다.
만일 하나님 나라를 말로 설명하려 했다면, 그게 얼마나 가능했을까? 이방인은 고사하고 유대인조차도 비웃었을지 모른다. 나라가 망한 이후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세울 메시아라고 선언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가짜였다. 말뿐이었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말로는 뭘 못하겠어!”
만일 예수님께서 말로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면,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을까? 설교를 아무리 잘한다 할지라도 말 뿐인 설교는 힘이 없기 마련이다. 예수님은 가르치고 깨닫게 하므로 사람들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말로만 전파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단지 기도하며 소망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는 보게 해주고 만지게 해주어야 했다. 그러면에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였다. 신학적 용어로 예수님의 오심은 곧 ‘그 나라의 현존’(現存 -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이루어짐)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했던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이루어짐을 보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이야기했던 분이고, 동시에 그 나라를 이루신 분이시다.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었다.
복음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세례 요한은 그 나라를 이렇게 묘사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눅3:4-6 새번역)
세례요한은 구약 선지자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 나라는 지금까지 존재하던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다. 높은 산과 골짜기가 있듯이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차별이 있었다. 돈 때문에, 신분 때문에, 지식 때문에, 권력 때문에, 인종 때문에, 남녀로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런 차별이 메꾸어져 공평하게 될 것이다. 굽은 것은 곧게 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될 것이다. 그 나라는 힘센 사람, 가진 사람만 구원받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보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좀더 과격하게 하나님 나라를 말하였다.
“그는(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눅1:51-53, 새번역)
마리아가 노래한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나라다. 무소불위 권력을 자랑하던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비천한 자를 앉게 하신다. 이건 완전 반역이다. 굶주린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 부유하고 불뚝 나온 배를 두드리던 사람은 빈손이 될 것이다.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4:18-20, 새번역)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고 실현되는 나라다.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이론도 아니고, 말뿐인 나라도 아니다. 교회 의자에 앉아서 기도만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나라가 아니다. 말씀을 읽고 큐티만 열심히 하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실천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듀크 대학의 기독교 윤리학 교수인 알렌 버히(Allen Verhey, 1945~2014)는 말했다. “나라가 사람들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라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사건들의 상태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임하기를 소망하며 기다렸다. 세상이 썩어 돌아가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영성 생활만 힘을 쏟고, 개인 신앙을 유지하면서,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오셔서 저들을 멸하시고 자신들은 구원하실 나라를 소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에게 곧 그 나라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마11:1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승천 하시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다. 이제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 그런데 내가 떠나고 나면, 너희들이 나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이제부터는 조용히 모여서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어라.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능력이 없으니 그저 개인 신앙생활만 힘을 쏟고 영성에만 관심을 가져라!”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한 후 제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저 말로만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을까? 산속이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 기도만 하고 영성 수련만 했을까? 그들은 세상으로 흩어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를 실현하도록 힘썼다. 비록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그들은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이 어떤 나라인지 이방에 보여주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든, 계시지 않든 계속해서 이루어야 할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말과 혀로 이루는 나라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루는 나라다. 이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이방에 보여주어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자로서 자의식을 분명히 가졌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확증하고자 성찬 예식을 거행하였다. 비록 이 땅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땅에 존재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함을 알았다.
세상 나라를 전복하는 하나님 나라,
차별과 억압과 착취가 없는 정의와 공의가 강수같이 흐르는 하나님의 공동체
마음 터놓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누구 하나 뒷이야기 하지 않고 품어주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이방인과 외국인과 나그네를 거리낌 없이 환대하고 받아주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
말로만 사랑하고 설교로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힘쓰고 애쓰는 공동체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 나라다.
참고도서
1. 레슬리 뉴비긴, 오픈 시크릿, 홍병룡 옮김 (복있는 사람;서울) 2017년
2. 도널드 크레이빌,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김기철 옮김 (복있는 사람;서울) 2017년
3. 알렌 버히, 신약 성경 윤리, 김경진 옮김 (솔로몬;서울)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