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출산하기
첫째 아이를 낳기 전 이탈리아 생활 8년 동안 병원은 근처도 가보지 않았다.
의료강국의 대한민국에 살다가 온 우리에게 이탈리아의 의료시스템은 어딘가 불안하다는 불신이 평소에 자리 잡고 있기도 했고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건강에 이상 징후가 보일라 치면 차라리 한국을 다녀오는 지인들, 그 와중에 급성으로 맹장수술을 한 지인의 수술부위가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곪아 고생고생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요새 맹장은 수술도 아니라는 데 그러한 것도 제대로 못하는 병원이라니 어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불신은 더욱 커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여기서는 아프면 절대 안 돼!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따금씩 감기에 걸릴 때면 약국에서 쉽게 구입 가능한 시럽 또는 캡슐 약으로 해결이 가능했고 다행스럽게도 기타의 문제는 생기지 않았기에 병원이라는 곳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헌데 임신을 했다.
한국에서의 출산과 이탈리아에서의 출산 중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했다. 이탈리아에서 몇 년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면 한국 출산을 했을 거다, 한데 앞으로도 이 곳에서 지속적으로 살 게 된다면 아무래도 한국 태생보다는 이탈리아 태생이 더 낫지 않겠냐며 남편과 이야기가 맞춰지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지난 8년 동안 내가 그러했듯 15년 차인 남편 역시 병원은 낯선 곳이었다. 더구나 산부인과라니 말이다.
이탈리아 의료시스템은 방식도 수순도 꽤 여러모로 불편했다.
우선 모든 것이 예약으로만 진행되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한 응급환자가 아니고서는 그 예약이란 것 또한 최소 일주일에서 한 달 이상이 소요될 만큼 하릴없이 기다려만 했다. 진료 한 번 보자고 하기엔 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나라 방식이 그렇다고 하니 큰 방도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디서든 그러하겠지만 그중에서도 Privata(프리바타:개인병원) 는 그나마 수월한 편이었다. 보험적용이 안되어 비싼 건 당연하지만 예약도 빠른 편이고 대처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역시 돈 앞에서 불가능 한 건 나라를 막론하고 없나 보다.
한국에서의 출산 경험이 전무하여 한국 시스템이 어떠한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이탈리아 경우는 임신 확인부터 출산 전까지 대부분의 검사는 혈액과 소변검사로 진행되고 초음파도 자주 보는 건 아니었다. 기형아 검사 1차, 2차를 제외하고 막달인 32주 차쯤 한 번 총 3번 정도 본 것이 전부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더 볼 수도 있겠지만 병원에서 요구했던 기록은 3번이 전부였다)
한국 병원 스타일만 생각하고 처음부터 아이를 낳기를 원하는 대학병원을 가서 진료 예약을 하려 했더니 고위험 산모냐? 태아에 특별 이상이 있느냐? 알 수 없는 질문세례를 쏟아붓길래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 병원에서 나는 아이를 낳고 싶고 그래서 이 곳에서 진료를 꾸준히 보고 싶다"라고 하니 뭐하러 벌써 왔냐는 듯, 예약 텀도 길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대답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출산을 위해서는 지정된 산부인과 의사에게 1차 진료를 받고 그 의사를 통하여 필요한 검사 목록이 적힌 리체따(소견서쯤?) 발부받아 집 근처 보건소 또는 병원에서 혈액, 소변검사를 한다. 그 기록을 차곡차곡 잘 모아서 진통이 오면 그제야 출산을 희망하는 병원으로 가면 된다는데 전혀 문외한 이 분야에 대해 알 길이 없었던 우리는 이 병원 가서 문의하고 피 뽑고, 저 병원 가서 또 물어보고 또 피 뽑고 아주 그냥 난장은 물론이고 피도 엄청 뽑아 고생도 잔뜩 했었다. 그래서 둘 째는 결코 그러지 않으리 처음부터 보건소만 야무지게 다니다가 출산 신호 오는 그날 출산병원에 가리 다짐 또 다짐을 했건만, 첫 째 출산하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 또 무언가가 바뀌었는지 이전 방법은 불가하단다.
출산을 희망하는 병원에서 검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그대로 출산까지 이어진다는 대답을 보건소 측을 통해 전해받았다.
아, 역시 로마에서는 로마 법을 따라야 하겠지?
어렵다.
내 나라도 아닌 이 곳에서 가뜩이나 어려운 외국어로 평소에 사용할 일이 전혀 없던 의료용어, 출산 용어까지 공부해가며 병원 다니는 것도, 긴 텀을 요하는 진료 예약조차도 어렵고 또 어렵다.
무지의 난관 속에서도 무탈하게 첫째를 출산했듯이 둘 째는 경험이 있으니 조금은 쉬울까 했더니 역시 세상에 쉬운 건 아무것도 없나 보다
다음 진료예약은 지금부터 한 달 하고도 보름이 훨씬 지나서 잡혀있다.
뱃속의 아이에게 매일 이야기를 한다.
"로마 태생이고 싶거든, 로마의 법을 따르자꾸나, 부디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동안 별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