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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지 말걸, 심통 내지 말걸

만삭 임산부의 호르몬 장난

by 로마언니

스케줄이 유동적인 남편은 쉴 땐 2-3주도 쉴 수 있지만 바쁠 땐 한 달 내내 쉬지 않고도 충분히 일 할 수 있는 장단점이 분명 존재하는 직업군이다.

둘째를 임신하고 초기엔 입덧으로 꽤 고생을 했던 터라 첫 째를 봐줄 겸, 겸사겸사 여럿 날 쉬었고 안정기에 들어섰을 때도 유별난 첫 째를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부탁 아닌 부탁을 했고 어느덧 만삭에 접어들었는데 거절하기 조금은 어려운 일이라 일주일간의 출장이 잡혀버렸다. 남편의 출퇴근이 아닌 오롯이 독박 육아를 감내해야 하기에 사뭇 걱정스럽긴 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으니 해보겠노라 했지만 남편이 떠나던 그 날부터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끊임없이 자책하게 되었다.

만삭의 몸으로 21개월 매우 활달한 아이를 케어하는 건 아무리 내 새끼래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남은 날들은 점점 걱정을 넘어선 공포로 다가올 지경이고 이상기온으로 5월까지도 경량 패딩을 찾아 입게 하던 날씨는 불현듯 폭염으로 바뀌었다.

창 을 열고 잠을 잔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선풍기 바람이 간절해지던 밤

지난가을 아들 녀석이 일어서기를 겨우 시작할 때쯤 철 지난 선풍기가 하필 왜 그곳에 있었던지 낑낑거리면 잡고 일어서는 통에 홀랑 넘어지면서 선풍기 테두리가 부서졌다. 얼핏 보기엔 간단히 본드로 붙이면 될 듯해서 붙여보지, 하며 그냥 뒀던 건데 결국 이 여름까지 오고야 말았다.

초저녁까진 창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이 꽤 시원했건만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간절해졌고 부서진 선풍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걸 보니 그제야 아차 싶다.

잠결에 아이도 더운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별 수없이 아이 곁에 앉아 부채질을 살랑살랑하고 있는데 순간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내 몸뚱이 하나만 해도 무더운 이 여름날, 더구나 만삭의 몸이니 출산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거다. 두배 그이상의 무더움을, 오락가락하는 심경의 변화를,

남편은 장기간 출장을 갔고 만삭으로 혼자 아이를 케어하기엔 버겁고 날은 무덥고 선풍기는 고장 났고

서럽다가 화도 났다가 엄한 불똥은 남편에게로 고스란히 튀었다.


로마의 흔한 여름, 트레비분수 인파는 앞으로 밤12시에도 여전하다



“대체 이게 고장 난 지가 언젠데 고치질 못하면 새로 사뒀어야 할 거 아냐, 이 밤에 애랑 더워서 잠 도 못 자고 부채질이나 하고 있고 이게 뭐냐고!!!”


한바탕 쏟아붓고 나니 영문도 모른 체 당한 남편은 어안이 벙벙한지 일단 자라고 만 연신 대답하는데 별 것도 아닌 일에 단단히 화가 난 나는 그만하질 못하고 더 쏘아붙이고 말았다. 참 별 것도 아닌 일에 말이다.


고장 난 게 남편 탓도 아니고, 진즉 새로 구비하지 못한 것 또한 남편 탓도 아니건만 그냥 이럴 때 옆에 함께 없다는 게 화가 났을 수도, 만삭 임산부의 호르몬 장난이었을 수도, 여하튼 쉬이 가라앉질 않는 울화에 화를 내면서도 이건 아닌데 싶은 좌불안석


결국 남편이 먼저 대화하기를 멈췄고 다음날 낮동안도 아무런 연락조차 없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한통의 카톡이 왔다.

‘월요일날 선풍기 하나 사러 가’


잘 모르겠다.

비단 선풍기 때문은 아닌데 괜한 심통에 밖에서 일하는 남편 마음만 상하게 했다는 게 영 신경 쓰이면서도 내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애랑 단 둘이 두고 긴 출장을 가버린 남편에 대한 섭섭함이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른다.


로마의 더위가 시작되었다



참 많이 보고 싶은데, 보고 싶다고 말하면 속절없이 쏘아댄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내 마음을 알아줄까? 남편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질까?

에잇, 그러지 말걸, 심통 내지 말 껄,

오늘도 역시나 무더워 쉬에 잠들지 못하는 밤, 아이 곁에 앉아 부채질을 하는 마음이 영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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