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기획자가 된 생명과학도
내가 입학한 건축과는 지방의 한 캠퍼스였다. 서울 본캠에도 건축과가 있었지만 공부하지 않은 나에게는 도전하기 어려운 컷이었고, 그래서 좀 더 낮은 곳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난생처음 서울 밖 생활이 시작됐다.
읍내까지 나가는 버스가 이따금 다니는 하숙촌. 내 전공이 맘에 들지 않아 화가 잔뜩 난 엄마와 내려와 허겁지겁 남은 하숙집 하나를 계약했다. 창문을 열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쌍무덤이 보이는 일명 무덤뷰였다.
이곳은 인근에 저수지가 가까워서 새벽이면 안개가 자욱했는데, 말 그대로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어 더듬대며 야간 작업 후 하숙집에 돌아가곤 했다.
하숙집에서 캠퍼스를 오가는 길은 일종의 야산이었고, 동네에서 유명한, 상태가 조금 안 좋은 언니 집(마주치면 사람을 때린다)을 지나 또 다른 무덤을 몇 개 지나면 되는 스릴 넘치는 루트였다.
그래도 밤샘 설계를 하며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건축과 구조 덕분에 동기들과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하숙촌은 마치 스머프 마을 같아서, 창문을 열고 “야~” 하고 소리치면 아는 얼굴 하나쯤은 나타날 분위기.
하숙집 사람들과도 이내 모두 친해져서 방학 때 서울에 돌아올 때면 어쩐지 허전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름 정을 붙인 곳이었지만, 나는 1년 만에 이곳 그리고 건축과를 떠났다.
일명 '탈건'.
1. 건축가란 무엇일까?
국민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건축가는 멋진 디자이너로 그려진다. 자신의 신념과 상상을 오롯이 설계도면에 펼쳐내는 직업.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 또한 그럴 것이고. 하지만 첫 설계 수업에서 만난 교수님은, 현실을 알려주는 첫 질문을 던졌다.
“너네 엄마아빠 돈 많니?”
그렇다. 건축가는 그런 직업이었다. 큰 자본으로 움직이는 이 시장에서 클라이언트의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순 없는 일. 나의 비대한 자아가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희망을 현실화하는 직업이 곧 건축가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또한 건축물은 오래도록 남아 환경에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까다로운 법규들을 모두 준수해야 한다는 점. 그러고 나서 남은 약간의 여백에, 나의 자유를 조금 시도해 볼 여지가 남는 것이었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나의(=곧 부모님의) 자본을 가진 채 건축을 시작하든가.
그것이 교수님이 던진 날것의 질문에 모두 담겨있던 것.
앞으로 5년간 이 길을 걷고 또 건축사를 향해 더 긴 길을 걸으면서,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내가 잘 수용할지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그렇게 매일 이 고민을 안고 으스스한 무덤길을 걸었다.
2. 너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라
엄마와는 늘 각을 세웠지만, 딸과 엄마가 그렇듯 가끔은 휴전의 시간도 있는 법이다. 휴전 중일 때에는 엄마가 이따금 기억에 남는 말을 해주곤 했다. 언젠가는 꽤 그럴듯한 말을 해줘서 맘에 꽤 들었다.
너랑 비슷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
슬프게도 엄마가 해줬던 이 말이 내 '탈건'에 불을 붙였다.
내 맘이 불바다가 됐던 건 첫 MT날. 대학원생 선배들부터 교수님들까지 모두 가는 큰 규모의 MT였다.
건축과 바닥답게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시고 뻗어 있는데, 밤늦게 숙소에 2학년 선배들이 들이닥쳤다. 좀 전까지도 웃고 떠들던 선배들이 싸늘한 얼굴로 우리를 깨워 나가라는 고갯짓을 했다.
우리들은 아직 술기운에 절여진 채로 서로를 흔들어 깨우며 어기적어기적 숙소 밖 공터에 모였다. 그 새벽에도 교수님들은 멀찍이 담배를 피우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한 대학원 선배가 술에 꼬인 혀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오래된 방식의 단체 훈육이 시작된 셈.
야, #$*(% 어깨동무, 어?
앉았다 일어났다 해!
앉을 때, 우리는
일어날 땐, 하나다, 외쳐!
몇몇은 술이 덜 깬 채 비틀거리다 넘어졌고, 누군가는 구석으로 달려가 구토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끝내 납득되지 않았지만, 밴드부 생활을 거치면서 이런 식의 훈육이 의미하는 바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고등학교 때 우리 기수에서 이 악습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어 대학교에 왔더니 교수님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이 짓을 시켜? 욕지거리를 꼭 참고 있든 그때, 대학원 선배가 내 맘에 라이터를 던졌다.
야, 니들 꼬우냐?
꼬우면 나가든가
그 한 마디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 O.K. 내 맘의 불바다 시작.
탈. 건. 결. 심.
1년의 시간 동안, 또 쉽게 포기하는 건가 싶어서 다른 학교 건축과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학교마다 악습의 정도와 문화가 달랐고, 그래서 내 역량, 그리고 그 역량을 충분히 키울 만큼의 시간만 있다면 내 의지와 신념이 문제인 결정.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역량, 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이겨낼 의지, 건축가로서의 지향하는 신념이 모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계속 불평하며 이 삶을 이어가는 것이, 진짜 건축가가 되고 싶어 온 마음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내가 된 것 같았다.
'나를 위해서도, 진심을 다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한편,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니즈가 반영된 공간을 구현하는 것'인데 이것이 반드시 '업'과 일치될 필요가 있는지 자문했다.
건축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낼 달성할 가능성을 타진해 보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고 확신했다. 나는 너무 좁은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조언들도 이미 기름을 부어둔 상황이었다. 오너 오빠(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는 건축과만의 '오너-시다' 문화)도, 하숙집에서 늦깎이 편입생이 된 오빠도 계속 권유를 했다.
넌 수능을 다시 봐라.
문제는 '엄마'라는 벽을 넘는 것. 그래서 배수진을 쳤다.
역시나 첫여름 방학엔, 나에게 신뢰가 바닥이었던 엄마는 재수생활을 수용할 리 없었다. 또 포기냐, 당장 돈을 버는 생활인이라도 되어라, 1년은 마치라는 말에 이 악물고 2학기를 버텼고, 아직은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딜을 했다.
엄마, 1년 휴학할게.
최소한의 인강비랑 독서실비,
식비만 좀 도와줘.
밥은 내가 알아서 차려 먹을게.
결과를 보고 다시 얘기하자.
우리 둘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면,
서로 Win-Win이잖아?
우리 둘이 납득할 결과가 안 나오면,
그땐 내가 공장에라도 가서
돈을 벌어올게. 어때?
그렇게 엄마를 꺾고, 나는 몰래 다음 해 휴학신청을 하지 않았다. 비등록 = 제적 당하기.
진짜 배수진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