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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눌프 Nov 10. 2019

비움의 역설

  채우지 않아도 나는 소중하다

흔히 속이 비어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공복의 상태가 지속되어 있을 때이다. 이때 배가 고프다는 강력한 신호로 무언가를 먹으면 오히려 탈이 나는 경우가 많다. 비어 있다고 가득 채우고자 하면 오히려 우리 몸에 안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삶에 어떤 부분이 결핍되어 있음을 느끼고 무언가를 가득 들이부으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삶에 더 큰 공허함을 가져다준다.


나는 결핍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철없던 어느 시절엔 그 결핍들을 무조건 다 채워야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과는 거리가 늘 먼 사람이었다. 그 결핍은 결코 내 힘으로는 채우려야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핍은 무조건 채워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이번 생은 글렀다며 포기한 것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었을 때 한편으론 편안했다.


무언가를 해보고자 안간힘을 쓰던 의욕이 넘치던 그때는 오히려 내 결핍을 채워보고자 더 나를 채찍질했었다. 그때 항상 나를 따라다니던 감정들은 늘 위태로웠다. 불안에 뒤쫓기고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차라리 의욕이 사라지니 마음만은 편안했다. ‘어떻게든 살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당장의 걱정이나 불안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미래를 위한 노력일 것이다. 이 결핍들이 충족되면 내가 그리는 행복한 미래의 시간 속에서 멋진 삶을 사는 나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의 나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오히려 내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현재의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 미래를 만드는 건 현재의 나라는 사실이 새삼 다시 느껴졌다. ‘어떻게든 살게 되겠지’라는 생각은 사실 굉장한 도전이다. 미래를 꿈꾸지 않고 현재의 나에게 내 삶의 모든 것을 거는 도박과도 같다.


그렇기에 오히려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억지로 채울 이유도 없었다. 어떤 부분이든 개인이 가진 결핍을 채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결핍을 채우는 건강한 과정을 밟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매번 결핍으로 무너지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무너지고 수없이 넘어지고 상처 받고 아파한다. 나는 더 이상 채우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빈 공간은 빈 공간인 채로 남겨두기로 했다.


비어있어서 무언가가 고픈 상태가 오고 또다시 허겁지겁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이 일생이지만 또 이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현재의 나이다. 비어있는 것조차 나의 일부분이라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미궁이었던 인생의 숙제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현재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지금의 내 모습도 괜찮다며 자신을 더 인정해주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비어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기에 더 다양한 것과 좋은 것을 언제든 담을 수 있는 그릇과도 같은 사람이다.


나를 인정하고 비워두었을 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채움과 만족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주는 재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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