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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mzam Jun 10. 2021

Final Round. 죽음을 이해하는 순간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는 여럿의 말에 별다른 감정이입 없이 고개를 끄떡이던 때, 죽음을 앞둔 내 모습을 상상하면 푹신한 침대에 포근히 누운 백발의 노인을 생각하던 때, 유명인의 사망 소식에 자뭇 놀라다가도 금세 일상을 찾을 수 있던 때. 그때로부터 멀어진 건 오히려 축복이다.



암 수술 1주년이 된 기념으로, 수술 부위 회복과 남은 반쪽이 잘 있는지 확인하는 초음파 검사, 음치에겐 이루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운 음성 검사, 혈관이 가는 탓에 주사를 여러 번 찔러야 하는 혈액 검사를 마쳤다. 검사실로 이동할 때마다 손을 잡아준 그대에게 감사하다.


딱 1년 전, 암임이 확실해진 순간, 자주, 그리고 많이 울었다. 왜냐면 난 20대이고, 이제 갓 새로운 시작을 했으며, 개 같았던 수험생활을 막 마쳤기 때문에, 혹시 이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인생에 행복을 양껏 누린 적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억울했다. 그도 그럴 것이 (1) 난 원래 걱정 부자이고, (2) 내 갑상선 암은 착한 암이 아니었으며, (3) 의사선생님이 날 겁나 불쌍하게 쳐다봤고, (4) 없을지 모를 미래를 위해 행복을 미뤄왔다. 이 당시 가장 상처가 되었던 사람들은, 갑상선에 혹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는 내 말에 ‘설마 암은 아니지?’라고 묻던 동기(아이러니한 건, 이 친구가 올 4월에 본인과 만나보자고 했는데, 이 말이 떠오라 거절했다.)와 결혼할 때 문제 삼는 상대쪽 어른이 있을 수 있는데 암환자 등록하겠냐던 의사선생님이다. 등록하든 안 하든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그냥 했다.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의 터닝포인트를 맞이 한다. 내가 암 수술을 한 것은 각도가 무자비하게 컸던 포인트일 것이다. 암 전후로 내가 삶을 대하는 사고방식이 아예 달라졌으니까. 난 죽음이 내 코앞에 있고, 내가 죽음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을수록 세포분열이 빨라 암이 금세 번진다니까 암인 줄 모르고 그냥 살았음 죽었을 테니 제대로 따지면 나는 지금 보너스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보너스가 얼마나 갈지 아무도 모르니 그냥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근데, 인간에게 죽음이 숙명임을, 그리고 그게 당장 오늘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살면, 상당히 많은 것들이 심플해진다.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명확해진다.(다만, 아는 것과 실천은 별개임) 그래서 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시답잖은 것들에 얼마나 집착하며 살았던가.


아프기 전에 나는 성공과 부를 탐닉하던 사람이었다. 이 두 가치가 하등 쓸모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중요도를 다시 설정했다는 것이다. 성공과 부를 행복의 디폴트 값이라고 생각하면, 마지막 날 영원한 수면 앞에서 후회할 것이다. 성공과 부 없이도 행복할 수 있었는데, 이를 모르고 불행하게 산 세월이 아까워지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에 대해 여기저기서 많이들 떠들어댄다. 이를 교육이 아니라 인생에 대입한다면, 성적이 아닌 삶에서 상위권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 맞는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맛을 느끼며 시시콜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것도, 4캔에 만 원 하는 수입맥주를 사다가 알쓰인 나는 한 캔, 상대는 세 캔을 사이좋게 나누면 딱 좋은 알콜 메이트가 있다는 것도, 아픈 것도 서러운데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내 손을 잡고 병원엘 함께 가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사실이다. 나는 가끔, 어쩌면 자주, 생각한다. 내가 운 하나는 진짜 좋은 것 같다고. 그 가설이 한 번 더 증명되는 요즘이다. 어떤 복을 쌓았길래 내게 온 행운일까. 굴러들어 온 복을 제 발로 걷어차는 사람만은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잘해야지.


오늘 사무실에서 옷에 커피 한 잔을 몽땅 엎질렀다. 이때 들었던 생각이, (1) 내가 흘린 음료가 콜라가 아니라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는 것, (2) 심지어 hot도 아니고 ice였다는 것과 (3) 오늘 입은 옷이 검은 옷이라는 것(아침에 하얀 원피스랑 고민함!)이 너무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축축한 이 상황을 이렇게나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에, 심지어 순간의 짜증도 일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 없을지도 모를 미래를 위해 행복을 미루지 말고, 오늘의 행복을 만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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