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세살이 Feb 01. 2019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터키편1

우리는 자주 타인의 시선을 견뎌내지 못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형성된

그들만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이 신뢰나 우정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계산이나 오해,

또는 혐오가 깔려 있다면

우리는 그 시선으로부터 아픔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거의 불가피하게 어떤 조직의 구성원으로

평생의 대부분을 살아가게 되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조직의 형태는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직장이 될 것이다.

최소 20년이 넘는 기간을

모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그래서 모두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완벽한 타인들이 직장이라는 같은 공간에 모인다.

이미 여기서 직장의 구성원들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직장의 타인들은

나의 진심을 파악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오해하고 때로는 이용한다.

어떤 타인들은 그들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고

그 시선을 또 다른 타인과 공유하는데,

이러한 시선 공유의 결과들은 거의 대부분

나의 본질과는 다르거나 무관한 무엇들이다.

용기를 내어 호소하는 나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시선이 다른 타인들이 나를 위한 진정어린

이해와 공감을 해 줄 수 있을까.

물론 가끔 시선이 비슷한 이들이 나타나

우정과 신뢰를 교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그들이라고 해서

나와 시선이 완벽히 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지점에서든지

나와 타인 간에는

오해와 실망과 갈등이 싹트게 된다.

직장생활의 모든 어려움은 사람으로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조언하기도 한다.

타인들은 사실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그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또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내 방식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물론 타당한 말들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저항의 방법 중 하나는

우선 그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은 우리가 흔히 할 수 있는

도피의 방식 중 하나다.

여행지에 머물고 있는 시간만큼은,

나를 괴롭혀 왔던 타인들의 시선들을

견뎌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홀가분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무인도에 간 것이 아니라면,

불행하게도 여행지에서는

더더욱 완벽한 타인들의 시선이

우리를 둘러싸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의 종류는

우리가 익히 겪어왔던 것처럼

계산과 오해와 같은 것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가 한 달간 여행했던

터키의 이스탄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스탄불의 주요 명소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시선은,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직장 동료들의 계산적인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인들은 관광객들을 향해

호감 가득한 목소리로 몇 마디 권유하면서

이 사람이 지갑을 여는지를 빠르게 파악하고,

지갑을 열지 않는 사람들은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어느 식당 호객꾼은

우리에게 배가 고파 보인다며

눈앞에 메뉴판을 펼쳐보였고,

그랜드 바자르의 어느 기념품점 상인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건네며 장미오일을 홍보했다.

우리가 지나치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똑같은 시선으로 다른 관광객들을 바라볼 뿐이다.



물론 모든 터키 사람들이 계산적인 시선만으로

우리를 바라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전쟁이나 2002월드컵처럼

한국과 터키가 함께 등장했던 이야기들 덕분에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영어로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어떤 아저씨가

한국전쟁을 표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총을 쏘는 몸짓을 보여줬던 장면을 떠올리면

미소가 지어진다.


그랬기 때문에,

갈라타 타워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그 구두닦이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구두통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저씨에게서

구두솔로 보이는 물건이 떨어졌다.

아저씨는 개의치 않고 계속 걸어갔고,

우리는 물건이 떨어진 사실을 그에게 말해줬다.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큰 길에서였다.


우리를 돌아본 그 구두닦이 아저씨는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구두솔을 줍고는

반갑게 우리의 국적을 물었다.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한국이라고 대답하면서

한국과 터키의 오랜 우정을 떠올리며

조금은 벅차올랐다.

그 순간 그는 ‘너를 위한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재빨리 무릎을 꿇고는

구두도 아닌 내 낡은 운동화를

그리 깨끗하지 않은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아내가 그를 제지하고,

그가 밝았던 얼굴을 굳히며

신발 청소비용으로 만원을 요구했을 때가 되어서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3천원을 쥐어준 후에

그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수많은 여행객 중 자신의 그물에 걸릴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손쉬운 상대 중 하나였다.



이스탄불의 축구장에서

터키인들은 우리를 오해했다.


이스탄불에는 유서 깊은 명문 축구팀들이 많다.

게다가 터키인들의 응원 문화는 열정적이고

지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스탄불의 축구팀 중 하나인

베식타스의 경기를 직접 보고 나니,

여태까지 봐왔던 여느 유럽축구팬들의 응원은

신사적이고 얌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유럽과는 다르게 터키의 경기장에서는

맥주 같은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는 팔지 않는다.

터키의 축구팬들은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서,

끊임없이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흥분한다.

상대팀을 향한 엄청난 야유도 90분 내내 이어진다.


그 인상적인 경기장의 분위기를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어서,

이번에는 이스탄불의 또 다른 명문 축구팀인

갈라타사라이의 홈 경기장으로 향했다.

미리 예매해 둔 티켓을 찾은 후

들뜬 마음으로 경기장 밖을 서성이고 있는데,

갈라타사라이의 유니폼을 입은

한 무리의 터키인들이 야단스럽게 우리를 반기며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자신들이 사랑하는

축구팀을 보러와 준 이방인들을 향해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것이었다.

우리를 향한 그들의 호의가 확실해질수록

우리의 의문은 더해졌다.

기분은 좋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스탄불에서 동양인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 텐데...

여기가 중심지가 아닌 외곽이어서 그런가?


경기장 입구의 직원들마저도

우리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향해

어떤 단어를 전달하고자 했다.

정답은 그 단어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경기장 밖에서 만난 사람들도

계속 그 단어를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나가토모”


아... 나가토모...

얼마 전부터 갈라타사라이에서 뛰고 있는

일본 국가대표 선수의 이름이었다.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그들은 우리를 나가토모를 보러 온

일본인들이라고 오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진심으로 반겨주는 그들에게

“사실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에요”

라고 말하며 찬물을 끼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경기장 안에서도 사진 요청은 계속됐고

우리를 둘러싼 많은 축구팬들을 우리를 주목했다.

하필 나가토모는 컨디션이 좋아보였다.

경기 중에 나가토모가 좋은 플레이를 펼칠 때마다

갈라타사라이의 팬들은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흡족한 아빠미소와 함께 박수를 쳐 주었다.

만약 나가토모가 골이나 어시스트를 기록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들쳐 매고 헹가래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제발 그러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다행히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고

갈라타사라이는 크게 이겼다.


경기장을 빠져 나가는 우리를 향해

관중석의 터키인들은 기립박수를 쳐 주었다.

일반적으로 관중들은

좋은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들을 향한

인정과 격려의 메시지를 담아

몸소 일어서서 힘껏 박수를 쳐 준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최초의 기립박수를

일본인이라는 오해 속에 받아 보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은

갈라타사라이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로 가득했다.

내 옆의 청년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국적을 물었다.

그때서야 나는 연기를 멈추고

당당하게 나의 국적을 밝힐 수 있었다.

분명한 실망을 보인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의도치 않은 오해에서 풀려난 나는

한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삶에서도, 여행에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은 불완전하다.

그들의 불완전한 시선이 전해지게 되면

우리는 답답하고, 당황하고,

어쩌면 절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을 해봐도 잘 떠오르지는 않는다.

좀 더 심각한 건,

나 역시 누군가에겐 타인이며,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를 향한 모든 시선들이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스탄불에서 우리가 한 달간 머무른

숙소의 호스트인 푼다(Funda)는

우리를 스스럼없이 환대했다.

직접 요리한 식사를 함께 하면서

몇 시간이고 즐겁게 대화하며

짧지만 그리운 우정을 쌓았다.

그녀는 현지인들만이 알 수 있는 시장들이나

직접 가본 맛집들의 리스트를

바쁜 와중에도 정성들여 작성해 주기도 했다.


고양이 천국인 이스탄불의

어느 카페에서 만난 한 고양이는,

내 다리에 꾹꾹이를 하며

처음 본 나에게 신뢰와 애정을 보여 주었다.


그래도 이런 시선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버틸 수 있는 게 아닐까.

여행에서도, 삶에서도.

매거진의 이전글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그리스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