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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자바의 포로수용소에 조선인이 있었네

by 이선 Nov 27. 2024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를 봤다.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 건물에 있던 시절에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봤다. 그때 시간이 안 맞아서 이 영화를 놓쳐 아쉬웠는데 국내 정식개봉작으로 관람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젠 고인이 된 두 음악 천재 데이비드 보위와 사카모토 류이치가 나온다. 십몇 년 전 내가 이 영화를 놓쳐서 아쉬워할 땐 두 뮤지션 다 살아 있었는데 몇 년 사이에 모두 우주의 별이 되었다. 오시마 나기사라는 일본 전후 세대 거장 감독이라는 이름값도 있지만 보위와 사카모토의 리즈 시절 비주얼만 봐도 내겐 본전 이상의 값어치를 했다.

한낮에 메가박스에서 봤는데 그 큰 상영관에 관객은 나밖에 없어 졸지에 황제관람을 했다. 영화의 원제는 <Merry Christmas, Mr. Lawrence>로 이 영화에 출연하고 OST도 작곡해 1인 2역을 해낸 사카모토의 동명의 명곡이기도 하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작곡가를 몰라도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친숙한 곡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인도네시아 자바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이자 2차 대전 참전 군인 이었던 로렌스 판 데르 포스트의 장편 소설 <씨앗과 파종자(The Seed and the Sower)>를 각색했다.  

영화 초반부에 연합국 포로를 감시하는 조선인 군속이 죽는 장면 나온다. 얼마 전 읽은 조형근 작가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가 생각났다. 책 제목은 작가가 시사인 잡지에 연재했던 18개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데 제목에 활용된 ‘콰이강의 다리’가 사뭇 충격적이고 울림이 컸다.

내겐 ‘콰이강의 다리’하면 그 유명한 휘파람 노래인 <보기 대령 행진곡>이 떠오르는 영화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연합국 전쟁 포로를 이용해 태국-버마 철도 건설을 강요했는데 거기에 조선인 젊은이들이 천 명이나 동원되어 포로감시원 역할을 했다. 이들은 훗날 일본이 패망한 뒤 연합군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로 인해 거의 대부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구조적 악에 의해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조선인 군속들의 존재를 이 책을 통해 먼저 알았고 영화로 확인사살한 셈이다.

<감각의 제국>(1976)으로 잘 알려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60년대 일본 뉴웨이브를 이끈 인물이다. 극렬 좌파였던 그는 아무래도 식민지시절 조선인에 대한 부채의식과 측은지심이 내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60년대 중반 궁핍한 한국을 여행한 뒤 제작한 다큐영화 <윤복이의 일기>(1965)나 재일교포 열악한 처우문제에 관한 <교사형>(1968)을 만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이 외면했던 재일조선인과 전후 어려웠던 한국인들 상황을 영화에 담았다.


이 영화에서도  조선인 포로 감시원인 가네모토와 네덜란드 포로 사이에 벌어지는 동성애와 폭력, 죽음을 비중 있게 다룬다. 영화가 국내에서 오랫동안 정식상영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조선인을 동성애자로 묘사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닐까. 어쨌든 뒤늦게 개봉된 이 영화를 통해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명분 없는 전쟁에 끌려가 이역만리타국에서 스러져 갔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 엔딩씬

기타노 다케시도 출연하는데 당시 코미디언이었던 그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노는 비주얼은 한참 떨어지지만 보위와 (역시 영화 데뷔작이었던) 사카모토에 비하면 가장 안정적인 연기를 선 보인다.

 그가 맡은 역은 폭력적인 일본군 하라 겐고인데 의외로  그의 대사와 클로즈업된 얼굴로 엔딩신을 장식한다. <살인의 추억> 엔딩의 송강호가 떠오를 정도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영화의 원제인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바로 기타노 다케시의 대사다.

연합군 포로들과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잔혹하게 대하는 하라 겐고의 모습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과거 <여명의 눈동자>에서 조선인 학도병 대치(최재성)를 괴롭혔던 일본군 오오에(장항선)가 생각났다. 그때 대치가  끌려간 곳은 미얀마 전선이었다.

데뷔작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한 젊은 시절의 기타노 다케시


 그저 내가 좋아하는 데이비드 보위와 사카모토 류이치의 모습을 보려고 영화를 봤는데 근현대사의 쓰린 현장을 목격한 복잡한 심정으로 극장문을 나섰다. 이 탈주선 없는 참담한 전쟁터에서도 동성애 형태를 띤 사랑이 꽃피고 저항도 있지만 주인공 존 로렌스(톰 콘티)를 빼고 죄다 죽거나 또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운명이다. 전쟁이란 게 그렇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대사를 감독은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예쁜 남자들이 등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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