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며시 꺼내 든 오래된 꿈
우선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약 한 달간의 일정 중 2주는 친한 선배를 만나기 위해 터키로 갔다. 선배는 두바이 간호사로 일하다 영국 병원으로 이직해 출근을 앞둔 상황이었다. 터키에 머무는 동안 선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부분 '간호사 때려치운 간호사는 뭘 먹고살아야 하는지'를 주요 이슈로 다뤘다. 살아온 햇수의 차이는 2년이지만, 2년 치 경험 이상의 넓은 스콥을 갖고 있는 그녀는 다양한 관점에서의 가능성들을 이야기해 주었다.("크루즈 간호사는 어때?", "터키에서 일본인인 척 타코야끼 파는 건 어때?")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말했다.
"해외에서 일하는 건 어때? 두바이, 홍콩, 싱가포르 같은 나라는 외국인으로 일하기 괜찮아."
선배가 해외취업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내 마음 깊숙이 묻혀있던 뭔가가 움찔했다. 해외에서 살고 돈을 버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꿈꿔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멀게 느껴져서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 뒀던 꿈이기도 했다. 이런 나를 잘 아는 선배는 해외에서 일하는 것의 장점, 그리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 번 도화선에 불을 붙이니, 의지가 불타올랐다. 무엇보다 나도 내 커리어를 전 세계적 스케일로 개척해보고 싶었다.
아, 이거였나.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선배의 조언과 여러 정보를 취합해 목표 국가는 싱가포르로 정했다. 귀국 후에는 '싱가포르 취업'이라는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레주메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구글링으로 깔끔한 양식을 찾아낸 후 주어진 칸에 Work Experience, Education, Skills 등을 적었다. 레주메 용으로 엄선된 동사와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동안 도서관에 출퇴근하면서 첫 레주메를 완성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내 첫 작품을 읽어봤다. 뭔가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 내 이력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선 뽑아만 보십쇼!'라고 외치고 있었다.
레주메의 기본은 설득이다. 내가 왜 이 직무에 적합한지, 내가 회사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어필하는 것이 레주메의 목적이다. 때문에 지원하는 직무에 대해 분석하고, 분석을 바탕으로 내가 가진 날것의 경험과 스킬들을 잘 매만져 회사가 원하는 모양새에 맞춰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이력서의 공란을 그럴듯한 말로 채우고만 있었다. 유일하게 해 본 취업준비가 직무 선택권 따위 없는 간호직이었으니 낯설 만도 했다.
뒤늦게 직무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원할 직무를 좁히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간호학 뿐. 병원에서 한 것도 간호 뿐. 회계, 마케팅, 인사, 재무... 직무 적성을 재고 따지는 것은 고사하고, 난 이것들이 뭘 의미하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간호대 졸업생이었으니까. 하하.
그동안 간호학 싫다, 면허 버리겠다, 열심히도 떠들고 다녔는데 기본도 없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자괴감이 들었다. 나름대로 고민하고 노력해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여태껏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았던 것 같아 기운이 빠졌다.
이래서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절박함을 느낀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떤 포지션에 지원할 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 인스타그램 계정 @writer.m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