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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 Aug 28. 2018

병원에서 멀리멀리 떠나고 싶다면, 단연 개발자.

플랜 C: 개발자 Developer




원하는 곳에서 살며, 시간, 장소 구애 없이 원격으로 근무하는 디지털 노마드 Digital Nomad라는 개념을 처음 만났을 때,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여행과 커리어 두 가지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니, 미치게 매력적이잖아?! 한동안 디지털 노마딩의 매력에 빠져 노마드로 살아갈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간호사와 디지털 노마드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환자를 보고 청진하고 만지는 게 일인 간호사가 원격 근무라니.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가 아닌가. 아, 내가 고등학생 때 이걸 알았다면 무조건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을 텐데!



디지털 노마드의 대표 직업, 개발자에 대한 동경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처음에는 "디지털 노마드를 실현 할 수 있는 직업이라니 부럽다..."로 시작했지만 부러움은 동경이 되고 나중엔 개발자란 개발자는 막연히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라고 불리는 치앙마이에 가서는(이미 의도가 다분함.) 카페에서 일하는 개발자를 흘깃대며 말 붙여볼 타이밍을 노렸고, 싱가포르 취업을 한창 준비하면서는 수많은 개발자 공고들이 굳이 눈여겨 보았으며(대체 이 많은 개발자 수요는 다 어디서 오는 걸까.), 어쩌다 개발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될라치면 직업 만족도라던지, 어떻게 개발자가 됐는지, 디지털 노마딩에 관심은 없는지, 눈을 반짝이며 물어봤다. 


그렇게 꾸준히 개발자 주변을 맴 돈 결과, 나도 모르는 새 잡지식이 많이 늘었다. 특히 비전공자 출신 개발자들이 필드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취업성공 패키지를 통해 듣는 개발자 수업은 전액 무료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상당한 성과였다. 이런저런 잡지식은 늘었지만, 그렇다고 감히 내가 개발자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아이덴티티를 간호사로 정의하고 있었고, 아날로그의 끝판왕인 간호사에게 코딩은 너무 먼 세계였다. 




... 하지만 계속되는 탈락은 사람을 바꾼다. 싱가포르 취준을 하면서 나는 이미 지원 공고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 가능한 지원 공고에 모두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공고 가뭄에 시달렸다. 나는 넘쳐나는 개발자 공고를 보며, 그리고 한국인 채용이라면 어떻게든 끼워 맞춰 지원해 보려 하는 내 처지를 돌아보며, 이럴바엔 아예 개발자로 전향해버리는 것은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간호사 출신인 내가 개발자가 된다면? 시작은 충동적이었으나 생각해 볼수록 괜찮은 계획이었다. 의료, 헬스케어 분야와 IT의 결합의 시너지 효과는 이미 증명되었고, 앞으로 절대 망할 일 없는 시장이다. 특히 최근에는 블록체인과 의료의 결합, 인공지능과 의료의 결합이 핫이슈가 아닌가.(실제 의료 정보와 블록체인을 결합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메디블록Medibloc의 CEO 두 분 중 한 분은 의사, 한 분은 치과의사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내 전공을 살려 의료-IT 스타트업에 조인한다면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 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병원에서 멀리멀리 떠나고 싶다면, 개발자만큼 완벽한 직업이 있을까? 이왕 병원에서 뛰쳐 나가기로 했으면 그 끝을 보고 와야지.








다행히 가까운 곳에 현직자가 있었다. 매주 함께 영어 스터디를 하는 스터디원 중 한 분이었다. 스터디 후, 찜닭을 먹으며 개발자로서 커리어 전환을 어떻게 생각하시냐, 운을 띄워봤다. 그분은 반색하시며 개발자로서의 전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셨다. 본인도 비전공자로 28살에 코딩을 시작해 지금 2년째 개발자로 일하고 있고, 전에 비해 업무 만족도도 굉장히 높다며 적극 추천하신다고. 오호라. 순식간에 찜닭을 앞에 두고 진로 상담이 장이 펼쳐졌다.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시던 그분께서는 내게 생활코딩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추천해주셨다. 


“코딩 관심 있다는 분께 몇 번 추천해드렸는데 보통 중간에 포기하시더라고요. 한 번쯤은 쭉 보시고 결정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생활코딩은 일반인에게 프로그래밍을 알려주는 온라인/비영리 커리큘럼이다. 유튜브에서 쉽게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웹사이트도 운영 중이다. 이고잉님의 전달력, 강의력이 아주 훌륭하시니 코딩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HTML강의로 입문해보시는 것을 강력 추천드린다. 코딩을 바라보는 그의 인문학적 시선은 감동적이기까지하다. (YouTube: https://youtu.be/tZooW6 PritE)



다음 날부터 생활코딩 영상을 보며 더듬더듬 코딩을 시작했다. 영상을 따라 허술한 웹페이지를 만들고 웹페이지들을 엮어 홈페이지를 만들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코드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코딩이라는 제 3의 눈을 떴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다 뒤늦게 한글을 깨치게 된 만학도의 마음이 이랬을까. 컴퓨터의 언어와 문법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즐거웠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굉장했다. 나는 곧 코딩에 빠져들어 혼자 공부하고, 이것저것 만들어 보며 꽤 많은 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확신을 갖기가 어려웠다. 난 원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지금 내가 하는 코딩은 교양 수준이었다. 이 정도의 맛보기를 가지고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을 결정해 버릴 수는 없었다.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고자 나는 지인의 지인까지 동원해 여기저기 조언을 구하고 다녔다. 웬만하면 현실적으로 말해달라고 부탁하면서.







1. 관광학도에서 퍼블리셔로 이직한 A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가볍게 개발자 이야기를 꺼냈더니, 퍼블리셔로 이직한 친구 A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A는 관광학 전공으로 전혀 컴퓨터와는 먼 삶을 살았으나, 일이 맞지 않아 취성패를 통해 이직을 시도한 케이스였다. 


A는 취성패 퍼블리셔 과정을 듣고 퍼블리셔로 취업에 성공함. 

첫 1년은 학원 연계 회사에서 박봉을 받고 일했음. 

1년 후 K회사의 외주업체로 이직하여 현재 3년 차 퍼블리셔로 워라밸과 월급에 만족한다고. 

친구 왈, "A는 원래 코딩 따위에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 엄청 만족하면서 다닌다. 하물며 개발자 노래를 불렀던 너는 A보다 낫지 않겠냐."



2. 전, 현직 간호사이면서 게임 개발자 간호사 선배 B 

친한 선배에게 개발자 이야기를 했더니, “그거 내 동기 B가 했던 얘기랑 똑같은데?”라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런 생각하는 간호사가 나뿐인 줄 알았는데, 먼저 길을 개척한 선배가 있었다니. 잽싸게 B 선배에게 연락을 드렸고, 간호사 선배인 만큼, 전현직 간호사 입장에서의 ‘현실적인’ 조언을 부탁드렸다. 


B선배는 약 2년 전 국비지원 교육으로 게임 개발자 과정을 수료했고, 현재는 요양병원에서 나이트(밤 근무) 전담 간호사로 일하며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개발하는 삶을 사는 중.

절대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길이라 당부하셨음. 본인은 낮에는 개발하고 밤에는 일하며 1년 넘게 공부하고 있지만 비전공자 출신으로서 갈 길이 멀다고 하심. 

하지만 개발이 재밌고, 목표(1인 게임 개발)가 있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다고.

간호사 면허로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으니 도전하는 것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조언. 

개발자가 취업이 쉽다지만 그래도 간호사만큼 쉽지는 않다.(눈물 또르륵)



3. 컴퓨터공학 전공자, 현직 프로그래머 사촌 C

동갑내기 사촌이 무려 컴공과 출신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내 진로 고민에 대해 C의 의견을 물었다. 전공자는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C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웹 개발자의 수요는 계속 있으니 좋은 회사를 잘 찾아서 경력을 시작한다면 충분히 좋은 플랜이라는 의견.

(헬스케어 스타트업에서 경력을 시작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 코딩을 재밌어하고 실력이 있다면 헬스케어 업계에서 프로젝트 이해도가 높은 개발자가 될 수 있을 것. 

개발자로 일하다 경력을 쌓은 후 기획자로 전향하는 케이스도 많음. 

업계 특성상 평생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는 건 각오해야 한다. 

만약 다른 길을 가더라도 코딩은 배워두면 언제든 쓸 일이 있고 후회하지는 않을 것.







워낙 파격적인 진로 변경이라 비관적인 여론을 각오하고 조잘거리고 다녔는데, 걱정이 무색할 만큼 모두 긍정적인 피드백뿐이었다. 심지어 부모님께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하고 싶으면 해 봐."라며 지지해 주셨다. 현직자 컨펌도 받았고, 전망도 좋고, 심지어 그렇게 꿈꾸던 디지털 노마딩도 가능한 직업인데 정작 나는 선뜻 앞으로 나설 자신이 없어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막연히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지워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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