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D, 연구 간호사 CRA
연구 간호사는 임상시험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을 통칭하며 보통 CRA, CRC를 이르는 용어이다.
임상시험 모니터요원(Clinical Reaserch Associate: CRA)
임상시험의뢰자(Sponseor, 일반적으로 제약회사)가 지정하여 임상시험 기간 동안 시험대상자의 안전과 권리가 보호되면서 과학적인 자료가 생성될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
임상연구 코디네이터(Clinical Reaserch Coordinator: CRC)
임상시험 수행 및 시험대상자 보호와 관련된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 시험책임자(임상시험의 수행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 주로 대학병원 교수)의 책임 하에 기준 및 관계 법령에 맞게 시험책임자가 위임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
이해를 돕기 위해 거칠게 말하자면, CRA는 회사 소속으로 각 병원에서 임상 시험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관리하고, CRC는 개인 연구자(교수) 소속으로 직접적인 환자관리를 맡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이 글에서는 CRA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해보려 한다.
간호사 출신 CRA는 장점이 많다. 임상 연구 모니터링이 주 업무인 CRA특성상, 의료기록을 이해할 수 있고 병원 시스템에 친숙한 것은 큰 장점이 된다. 때문에 업계에서도 간호사 출신을 선호하고, 실제 간호사에서 CRA, CRC로 전향하는 비율도 높다. 그 외에도 임상 연구가 전문적인 영역이라는 점, 다른 직종에 비해 이직이 활발하고 그만큼 연봉 인상률이 높다는 점 또한 매력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해외로 나가고 싶기 때문에 외국에서 일할 가능성이 있는 직업이라는 것도 큰 매력으로 느껴졌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충분한 업계 경험과 능력이 있다면 외국계 회사로 이직이 가능하고, 주재원 등 여러 루트를 통하여 해외지사에서 일하는 것도 가능하다. 드물긴 하지만 경력을 살려 외국에서 CRA로 근무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다.
CRA는 내 항상 마음속에 최후의 보루처럼 남아있던 해묵은 선택지였다. 주변 간호사 선후배, 동기들이 많이들 이직했기도 했고(물론 각자의 평은 달랐으나 병원보다는 낫다-라는 것이 주된 이야기.), 다들 쉽게 전향하던데 내가 지원하면 안 될쏘냐 싶은 오만한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해외 취업의 벽을 느끼고, 선뜻 개발자로 발을 들이기도 망설여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잘 아는 세계, 내 커리어가 존중받는 세계가 그리워졌다. 간호사로서는 나쁘지 않은 스펙인데, 포지션을 바꿔 구직하려고 하니 세상이 그렇게까지 냉정해질 수 있는지. 눈물 찔끔 나는 나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깊이 묻어뒀던 연구간호사라는 직업이 맘속에 두둥실 떠올랐다.
이쪽 업계는 어떤가 맛도 볼 겸, 임상시험 입문 과정을 신청했다. CRA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선배 덕에 알게 된 교육과정이었다. 당시엔 싱가포르 취업을 한창 준비하던 중이었지만 사람 일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신청했더랬다.
임상연구자 교육은 한국 임상시험 산업본부(KONECT)에서 시행하고 있으며, 홈페이지(http://lms.konect.or.kr)에서 신청할 수 있다. 과정에 따라서 특정 요건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나는 특정 요건이 필요 없이 하루 만에 수료 가능한 임상시험 입문(신규자) 과정을 들었다. 실제 현직자 분들이 강의하시고, 강의 내용도 알차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수료하기를 강력 추천한다.(무료에, 간식까지 준다.)
강의를 들으면 전반적인 임상 시험 진행 과정을 알 수 있을뿐더러 만약 내가 CRA 혹은 CRC로 일하게 되면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대강 감을 잡을 수 있다. 수강 후 시험을 통과하면 수료증도 나오므로 관련 업계 취업 시 이력서에 한 줄을 추가해 충분한 어필을 할 수도 있겠다.
임상연구자 교육을 듣고 있자니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용어들이 귀에 쏙쏙 박혔다. 둘러보니 약사, 간호사 등 병원에 근무하시는 분도 많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묘한 소속감에, 반가운 마음이 들다가 이내 복잡해졌다. 그렇게 탈출하고 싶어 한 업계인데, 그동안의 시간과 정은 무시할 수 없구나. 그리고 몇 주 뒤, 싱가폴 취업을 살짝 뒤로 미뤄두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CRA 관련 정보를 알아보고, 관련 준비도 시작했다. 자존심 상하지만, 연구자 교육을 들으면서 느꼈던 소속감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우선 지원해보기나 해야겠다, 붙을지 말지는 어차피 내 결정 밖의 일이잖아.
빛의 속도로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에 마음도 조급해지던 찰나였다. 마침 업계에서 유명한 국내 임상시험 수탁기관의 신입 CRA 채용 공고가났다. 마음이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원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던지라 나는 우선 지원서를 내 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지.
나는 지원서 웹페이지에 내 개인 정보를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출신 학교, 영어 점수, 간호사 면허 번호 등등을 기입하고 나니 마지막으로 자기소개서 항목이 남았다. 대여섯 개의 자소서 항목을 훑어보았다. 딱히 특별할 것 없이 다분히 평범하고 한국적인 자소서 문항들이었다. 왜 CRA가 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 줄 건지, 일 하는 중 이러저러한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할 건지, ...
나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적절히 윤문 해 입력했다. 처음에는 빈 칸을 그럭저럭 채워나갈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속도는 급속히 느려졌다. 느려지다 못해 결국 글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숨도 턱, 하고 막혔다. '갑'을 대하는 태도를 은근히 물어보는 자소서 항목이, 불안감에 등 떠밀려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는 내 모습이, 맘에도 없는 대학병원 간호사가 되고 싶다 외치던 면접장의 내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전공 따위 때려치울 거라 다짐하며 휴학했지만, 결국 '그나마 해 두었던 것'을 따라 복학했던 그때의 결정. 다른 동기들이 모두 대학병원에서 간호사 커리어를 시작하니 이게 정답이겠거니 하고 흐름을 따랐던 그때의 선택. 그리고 그렇게 마음의 소리를 묻어두고 내렸던 결정들이 쌓여 만들어 낸 결과는 어땠었나. 조금만 지나면 나아지겠지, 내가 아직 충분히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하며 버텼던 시간들은 나를 비웃었다. 내가 간호학을 전공하고 간호사를 하며 얻은 것은 "간호사는 아니다."라는 깨달음뿐이었다.
결국 나는 또 내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알량한 커리어와 타협하면서 전혀 끌리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결정 방법이었고, 가장 쉬운 결정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또한 가늠할 수 있었다. 몇 년 뒤 또 후회하고 자책하는 내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지원서 저장하지 않기" 버튼을 누른 뒤, 웹페이지를 닫았다.
사실, 플랜 C와 플랜 D는 상호 보완적 관계이다. 연구간호사는 내 전공에 맞닿아 있고, 개발자는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일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연구간호사는 내가 잘 아는 세계이지만 개발자는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삶이 펼쳐질지 감도 잡히지 않는 세계이다. 나는 매일 고민했다. 돌아보니 나는 도망쳐 나온 곳으로 돌아갈 자신도, 이곳에서 앞으로 나아갈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
나는 나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답은 내놓지 못했다. 나는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면서 싫은 것만 많은 나를 타박하고, 책망하고,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어떻게 하면 이 시기의 혼란함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내 일기의 한 부분을 발췌해 옮겨본다. 갈팡질팡,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안고 토해내듯 일기를 쓰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던 날이다.
나: 엄마 나, 머리 터져.
엄마: 고민하는 것 때문에?
나: 어... 사실 임상시험 쪽도 찾아봤는데, 쉽지 않더라고. 내가 병원이랑 교수들 너무 싫어하잖아. 그런데 거기서 일하면 완전 을, 병, 정이래. 중간에서 일정 조정하고, 커뮤니케이션하고 해야 되니까.
복학했을 때 생각나. 나 간호사 싫다고 휴학했는데 결국 학교로 돌아갔잖아. 그때도 뭐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해놓은 게 아까워서 돌아간 건데 결국 지금 후회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개발 공부 시작하는 게 무서워서 포기하고 이쪽으로 돌아가면 똑같이 후회할까 봐 겁나.
엄마: 맞아 너 계속 간호사 하기 싫다고 했었어. 우선 간호사 쪽은 아닌 거 같고... 근데 엄마 생각엔 너 개발자 잘할 거 같은데.
나: 그런 것도 있어. 좋아하는 것에 끌려서 선택하는 거면 오히려 고민을 덜 할 거 같거든? 근데 지금은 싫은 것에서 도망치는 거잖아. 도망치다가 결국 이것도 아니구나. 하고 또 포기해버리면 어떡하지.
엄마: 그건 아니지. 남들 4년 공부 따라가려면 너도 피 터지게 해야지. 계속 공부 열심히 하고... 아니면, 해외취업으로 밀어붙이던가. 뭐가 됐든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어떻게든 올라가 봐.
엄마 생각엔 둘 중에 하나 정해서 해야 될 거 같아. 젊잖아.
나: ... (이미 우느라 정신없음)
엄마: 고민해봐 알겠지? 엄마 이제 출근해야 돼. 두시야.
나: ...응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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