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를 찾는 일
한참 비가 오는가 싶더니 창살 사이 잠깐 햇볕이 내려앉는다. 일기예보와 다른 날씨에 괜스레 더 반가웠다. 빨래를 할까 밖으로 나가볼까 한참을 고민을 하다 세수를 했다. 갑자기, 찰나, 잠깐이 주는 힘이 대단하다. 이번주 출산을 앞둔 37주 차 산모를 벌떡 움직이게 하니 말이다. 작은 손님이 올 날이 머지않았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마음껏, 충분히 해내야 한다. 어떤 존재가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소중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우리는 서툰 감정을 품고 잔뜩 부풀어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만약에를 가정하며 살아왔다. 20대 초반 그렸던 만약에의 삶에 겨우 안착했지만, 여전히 어딘가를 표류 중인 느낌이 자주 들곤 했다. 직업이 내가 되기도 했고, 직업이 없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형태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시시각각 변했다. 그러다 우연히 나를 향한 칭찬을 들으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불편해하곤 했다. 괜찮은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을 겸손이라 생각하면서 실상은 부정적인 내 모습을 습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반복하던 터였다. 인정욕구의 함정에 빠져 남들이 맞다고 하는 길만 가는 것, 세상이 요구하는 어떠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에 집중된 지난날이었다.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느라 나의 인생을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픈 사실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진짜 내 편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였는데도 말이다.
임포스터(impostor)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남을 사칭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자신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뛰어나지 않으며 자신이 주변을 속인다고 믿는 불안한 심리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나탈리포트먼, 엠마왓슨과 같은 유명스타들이 겪었던 증상으로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본인을 ‘의도하지 않은 사기꾼’이라 명명하며, 자신의 업적이 받는 세간의 관심과 존경이 과분하다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누군가도 단 한 사람, ’나‘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것. 모든 혼돈의 출발점은 나를 잘 알지 못하는 것,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메타인지의 중요성은 몇 번을 말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타인이 기준이 되는 삶은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모든 기준은 ’나‘여야 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신이 나고, 누구와 함께 할 때 행복한 지,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칠 때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것. 살면서 바라본 사람들 중 이를 아는 사람은 은은한 반짝임을 품고 있었다.
겸손은 미덕이며, 배려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주입식 명제 덕에 눈과 귀를 타인을 향해 열어둔 것이 되려 독이 될 줄 몰랐다. 내가 나의 얘기를 듣지 않는데 누가 내 말에 귀 기울여줄까. 쉬운 문제였는데 답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꽤 오랜 시간 ‘적당히’와 ‘안정’을 추구하며 그럴듯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본질은 알맹이에 있었다. 알맹이가 없는 삶은 목적지 없이 유류에 휩쓸려 가는 돛단배와 같았다. 그럴듯하게 살아가다 보면 그럴듯한 회사의 직함과 영어로 길게 나열된 아파트의 주인이 될 수는 있겠으나, 조금씩 스며든 공허함이 잔잔한 표면 위에 일렁이다 어느 날 뛰어올라 나를 덮치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월함과 자존감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켜가며 나를 인정하는 길을 찾아나가야만 했다. 삶은 알맹이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 나이를 먹을수록 난 내가 맘에 들 것 같아.
지난날 남편에게 한 말이다. 그는 본인이 최근에 들은 이야기 중 가장 희망찬 이야기라고 감탄했다. 사실 나에게 말하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나를 좀 더 사랑해야만 한다. 이 혼자만의 다짐은 가끔은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멋진 어른이 될 것만 같은 우쭐함에 빠지게 하곤 했다. 나를 인정하는 것. 나를 가리고 있던 얇은 가면을 내려놓는 것. 어느 날 갑자기 늘어난 불안감에 홀로 눈물짓는 나도, 칭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도, 그냥, 그래 난 그냥 그런 사람이야라고 인정해 보는 것.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 축사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