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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Oct 23. 2024

마트 가서 담배 좀 사온나

부부의 세계



-oo 엄마, 마트 가서 담배 좀 사온나.



 십여 년 전 어느 날이었다. 아빠가 마트 앞에서 서성이다 들어가지 않고 뒤따라 오던 엄마와 나를 향해 말했다. 왜 마트를 바로 눈앞에 두고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건가 의아했는데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너네 아빠 담뱃값 없나 보다.



 엄마의 말에 '그런가..' 하고 그녀만큼 담담히 말했지만 속에선 잔잔한 지진이 일었다. 늘 기댈 수 있는 사람 같았던 50대 초반의 어른이 담뱃값 4500원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충격은 마음 가까운 곳에 쿵 내려앉았다. 그 누구보다 단단해 보였던 한 가장의 자존심이 지긋이 뭉그러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당시 아빠는 건설 경기 불황과 함께 오랜 경제활동 공백기를 겪고 있었다. 아빠가 집에 있는 날이 늘어갈수록 우리의 불안감도 함께 늘어갔다. 우리 집 그 누구도 서로의 불안감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았다. 가장 괴로운 것은 아빠라는 것도.



  아빠의 무너진 자존심만큼 나를 아리게 한 것은 엄마의 덤덤함이었다. 경제활동을 쉬고 있는 아빠를 대신해 엄마는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주방에서 일을 하셨다. 꽤 오랜 기간 우리 집의 실질적인 가장역할을 해오셨다. 누군가에게는 억울하고 힘들었을 그 세월을 엄마는 덤덤하게 지나왔다. 나에게는 분명 어려웠을 일이었다. 지난 30년간 3남매의 귀는 항상 엄마에게 열려있었음에도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빠를 향한 날 선 말을 우리에게 하신 적이 없었다. 혹여나 아빠가 자존심 상할까 속상함에 얹은 배려심을 행동으로 묵묵히 보였을 뿐이었다. 그날도 조용히 지갑을 챙겨 담배를 사러 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커 보였다.



 그 세월이 쌓여 우리 가족을 이루는 단단한 무언가가 되었다. 그 무언가는 말로 설명할 수도, 남이 대체할 수도 없는 오묘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지금 아빠는 엄마의 그림자가 되셨다. 늘 함께인 동시에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는 1분 대기조와 같았다. 아빠는 주말부부 중인 엄마가 약속이 있는 날이면 당진에서 달려와 울산에서 포항까지 데려다주곤 하셨다. 긴 장거리 운전이 아빠에게 무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긴 하지만 오랜 주방 일로 닳아 없어진 무릎 연골 탓으로 엄마가 고생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사랑한다는 최대치의 표현을 엄마처럼 묵묵히 보여주시는 것 같아 감히 흐뭇할 뿐이었다. 나는 두 분의 삶에서 ‘본’을 배웠다. 부부는 이렇고 저렇고 설명하는 게 아니었다. 부부란 그저 묵묵히 함께 지나오는 것. 그리고 서로의 마침표를 바라봐주는 것. 그뿐이었다.



 작은 존재를 만난 이후 우리는 어떤 부부가 될 것인지, 이 아이에게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아이를 마주한 순간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성적표가 나를 향해 날카롭게 던져졌다. 점수는 꽤나 처참했다. 아이에게 물려줄 제대로 된 재능 하나 없었다. 왜 나는 그때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안 했을까.. 왜 리코더 못 부른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을까.. 노래라도 배워놓을걸.. 예쁜 목소리로 아가에게 동요라도 불러줄 수 있을 텐데.. 여러 생각이 뒤따라왔다. 무엇보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 아이에게 스며들 생각을 하니 문득 무서워졌다. 내가 그동안 틀린 생각을 하고 살아왔으면 어쩌지.. 책임감을 넘어선 압박감이 가슴 깊숙이 관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출처없는 확신이 든다. 우리라면 아가를 멋진 어른으로 키울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 지난날 우리엄마, 아빠가 그래오셨듯. 내가 배운 세상이 그러하듯 서로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마침을 향해 걸어가야지. 그리고 유난스럽지 않게 사랑을 건네야지. 이 아이 또한 우리의 삶에서 본을 배울수 있기를. 우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하게 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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